2026년 8월 12일
생명/생활/문화
전체기사 지난 연재 기사
귀 막기와 귀 기울이기

[월간 꿈CUM] 테마로 읽는 구약 성경 – 듣기 (03)

폰트 작게 폰트 크게 인쇄 공유

출처: 월간 꿈CUM


사람은 자기 귀를 막을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부모님 잔소리가 듣기 싫을 때 큰 소리의 음악이 흘러나오는 헤드폰을 쓰는 것처럼요. 귀를 막는 행위는 마음에 벽을 세우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말씀이나 가난한 이의 부르짖음에 귀를 막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들으려 하지 않고 등을 돌렸으며, 듣지 않으려고 귀를 막았다. 그들은 만군의 주님께서 당신의 영으로 이전의 예언자들을 통하여 자기들에게 보내신 율법과 말씀을 듣지 않으려고, 마음을 금강석처럼 굳게 만들었다.(즈카 7,11-12) 예언자들은 이 귀먹음을 할례받지 않은 귀로 표현합니다. 그들의 귀는 할례를 받지 않아서 들을 수가 없습니다.(예레 6,10) 예언자들이 말하는 귀의 할례는 마음의 할례를 가리킵니다. 참으로 하느님과 계약맺은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육체의 할례만으로는 부족하고 영적인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응답을 드리면 하느님께서도 우리의 말을 들어주십니다. 성경은 마치 하느님께 우리처럼 귀가 있는 듯이 묘사합니다.
백성이 주님의 귀에 거슬리는 불평을 하였다. 주님께서 그것을 들으시고 진노하셨다.(민수 11,1) 바로 이 들음이 하느님과 우상을 구별하는 특징 가운데 하나입니다.
저들의 우상들은 은과 금 사람 손의 작품이라네.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시편 115,4-6)

우리의 형편을 굽어살피지도, 우리의 부르짖음을 들을 수도 없는 무능한 우상이 우리를 구원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누군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그 사람이 우리 안에 들어오도록 허락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지문(指紋)처럼 성문(聲紋)이 있습니다. 즉, 모든 목소리는 고유하기에, 우리는 목소리를 통해서 그를 알아차리고, 그를 맞이하며, 그의 현존에 전율합니다.

하느님께도 목소리가 있어 우리에게 들려주십니다.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느님께도 목소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초월적인 하느님께는 우리가 볼 수 있는 모습은 없고 오직 들을 수 있는 목소리만 있다고 말입니다.
그때에 주님께서 불 속에서 너희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말씀하시는 소리는 들었지만, 어떤 형상도 보지 못하였다. 너희는 소리만 들었을 뿐이다.(신명 4,12)

목소리는 생명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입이 있어도 말을 할 수 없는 우상(시편 115,5)과 달리 하느님의 목소리는 하느님께서 살아 계신 분이심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목소리는 때로는 너무 고요합니다. 엘리야 예언자가 체험한 하느님의 목소리처럼 말입니다.

지진이 지나간 뒤에 불이 일어났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불 속에도 계시지 않았다. 불이 지나간 뒤에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들려왔다.(1열왕 19,12)

이 고요한 목소리는 소란스러운 가운데서는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침묵 중에 머물러야 합니다. “들으라”라는 하느님의 명령은 신명기와 예언자들을 통해 수없이 반복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명령은 잘 이행되지 않았습니다.

내 백성은 말을 듣지 않았고 이스라엘은 나를 따르려 하지 않았다.(시편 81,12)

고요한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들어라”라는 하느님의 명령은 여전히 같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다.(요한 14,24)

십자가의 성 요한은 이렇게 적었습니다. “하느님은 이 유일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단 한 번에 말씀하셨기에 더는 우리에게 말씀하실 것이 남아 있지 않다.” 그런데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는 일방적이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만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도 우리의 말을 들어주십니다. 예수께서 들으시는 방식을 보면 진정한 들음의 학교라 부를만합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시는 장면을 봅시다.(요한 4) 예수님은 표면적 의미에 집착하여 오해에 오해를 거듭하는 이방 여인의 말을 지치지 않고 계속 들어주십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말을 들어주시면, 특히 상처받은 이나 죄인의 말을 들어주시면, 그들 앞에 새로운 미래가 펼쳐집니다. 예수님의 들음은 자캐오에게 무슨 일을 일으켰습니까? 또 니코데모에게는요? 예수님은 이들의 깊은 욕망을 듣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욕망이 어떤 것이라도 무관심하지 않습니다. 귀 기울여 다 들으신 뒤 그들이 스스로 진리 안에서 선택하도록 허락하십니다. 절대 어느 쪽으로 유혹하거나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항상 예수께서는 ‘만일 네가 원한다면’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 말씀은 우리 삶의 중심을 바꾸고 우리의 역사가 새롭게 시작되게 합니다.




글 _ 함원식 신부 (이사야, 안동교구 갈전마티아본당 주임, 성서신학 박사)
1999년 사제서품 후 성경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를 위해 프랑스로 유학, 파리 가톨릭대학교(Catholique de Paris)에서 2007년 ‘요나서 해석에서의 시와 설화의 상호의존성’을 주제로 석사학위를, 2017년 ‘욥기 내 다양한 문학 장르들 사이의 대화적 관계’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삽화 _ 김 사무엘
경희대학교 미술교육과를 졸업했다. 건축 디자이너이며, 제주아마추어미술인협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제주 중문, 강정, 삼양 등지에서 수채화 위주의 그림을 가르치고 있으며, 현재 건축 인테리어 회사인 Design SAM의 대표이다.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26-08-12

관련뉴스

말씀사탕2026. 8. 12

유딧 8장 25절
모든 것이 그러하더라도 주 우리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시다.
  • QUICK MENU

  • 성경
  • 기도문
  • 소리주보

  • 카톨릭성가
  • 카톨릭대사전
  • 성무일도

  • 성경쓰기
  • 7성사
  • 가톨릭성인


GoodNews Copyright ⓒ 1998
천주교 서울대교구 · 가톨릭굿뉴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