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례성사를 받은 그리스도인은 늘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살아간다. 그러나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다 보면 ‘은총’이라는 말은 어느새 삶과 동떨어진 단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우리는 언제, 어디에서 하느님의 은총을 만날 수 있을까.
올해 은경축을 맞은 남상근(라파엘) 신부가 첫 책 「은총 수업」을 통해 은총의 의미를 전한다. 오랜 시간 서울대교구 대신학교에서 영성 지도를 담당하며 ‘신학생들의 위로자’로 불려 온 남 신부는 정답을 제시하기보다 일상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발견하도록 초대한다.
그가 말하는 은총은 특별한 체험이나 극적인 사건이 아니다. 매일 마주하는 사람, 때로는 어려움과 아픔 속에서도 하느님께서 함께하심을 깨닫는 것이다. 책에는 믿음이 어떻게 삶으로 드러나는지를 보여 주는 이야기가 나온다.
극심한 가뭄이 이어지던 어느 날, 한 시골 본당 신자들은 비가 내리기를 바라며 기우제 미사를 청했다. 미사가 봉헌되던 중 비가 쏟아지자 사람들은 허둥지둥 자리를 피했다. 그러나 모니카 할머니만은 가방에서 조용히 우산을 꺼내 들었다. 비가 내릴 것을 믿고 미리 준비해 온 것이다.
이 이야기는 믿음이 단순히 희망에 머물지 않고 삶의 모습으로 드러난다는 사실을 전한다. 은총을 믿는 사람은 하느님의 사랑에 자신의 삶으로 응답한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은총을 입은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할까.

남 신부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라는 말씀에서 답을 찾는다. 그는 부모가 나를 사랑했기에 나도 부모를 사랑하고, 누군가가 나를 사랑했기에 그 사랑에 응답하는 것은 자연스럽지만, 예수님의 사랑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고 설명한다. 십자가를 통해 전해 받은 사랑을 서로에게 주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것이다.
그는 책의 여러 장면에서 ‘용서’에 대해 말한다. 사랑의 가장 어려운 실천이 용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누군가의 잘못을 두고 ‘이번에는 용서하지만 다음에도 같은 잘못을 한다면 그때는 참지 않겠다’고 생각하곤 한다. 남 신부는 이 같은 태도는 진정한 용서가 아니라 분노를 잠시 미뤄두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짚는다.
그는 ‘만 탈렌트를 빚진 종’의 비유를 통해 용서받은 사람이 살아가야 할 모습을 설명한다.(마태 18,22-35 참조) 한 종은 자신이 갚을 수 없는 큰 빚을 주인으로부터 탕감받지만, 정작 자신에게 작은 빚을 진 동료에게는 자비를 베풀지 못한다. 이 장면은 하느님께 받은 용서와 사랑을 기억하지 못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 준다.
남 신부는 세례성사와 고해성사를 통해 용서받은 그리스도인은 ‘용서받은 사람의 삶’과 동시에 ‘용서의 은혜를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하느님께 받은 사랑은 다른 이에게 흘러갈 때 비로소 완성된다는 것이다. 이 책은 거창한 신앙 체험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삶의 한복판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그 사랑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지 묻는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은총의 뿌리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가를 깨닫는다면 설레어 저절로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열매가 아니라 크신 사랑을 확인하는 일입니다. 도저히 선택될 수 없는 나임에도 씨앗에 담긴 생명으로 조건 없이 세상에 뿌려졌음을 기억하는 일, 이 사랑에 감사하고 감격하는 것이 먼저입니다.”(215쪽)
황혜원 기자 hhw@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