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한국교회가 103위 성인과 124위 복자를 비롯한 수많은 순교자의 신앙을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순교 역사를 증언하고, 찾아내며, 연구해 온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는 교회 전체의 노력이 있었지만, 순교의 현장을 기억하고 전한 평신도들의 역할 또한 매우 컸다.
올해 순교자 성월을 맞아 순교 역사를 지켜 온 평신도들을 조명한다. 그 첫 번째 인물은 순교자들의 행적을 증언하며 한국교회 순교사 정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박순집(베드로, 1830~1911)이다.

그는 어떻게 ‘순교자들의 행적 증거자’가 됐나
인천교구 강화도 갑곶 순교 성지에는 ‘순교자들의 행적 증거자 박순집의 묘’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박해 시기인 1830년 10월 9일 지금의 서울 후암동에 해당하는 남문 밖 전생서(典牲署)에서 아버지 박 바오로와 어머니 김 아가타 사이에서 태어난 박순집의 삶은 순교자들의 시신 수습과 안장, 그리고 행적 증언으로 요약된다.
박해가 끝난 뒤 조선교회가 순교자 시복을 추진할 때 그는 가장 중요한 증언자였다. 시복 수속 과정에서 그의 증언을 기록한 「박순집 증언록(朴順集 證言錄)」(이하 증언록)이 세 권으로 편찬된 것은 그가 한국교회 순교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보여 준다.
제7대 조선교구장 블랑 주교는 1888년 순교자 시복을 위해 프와넬(Poisnel) 신부에게 순교자 행적 조사를 지시했다. 프와넬 신부는 박순집의 증언을 들었고, 서기를 맡은 권 타대오는 그 내용을 한 마디도 바꾸지 않고 기록했다. 그 결과 증언록에는 150여 명의 순교자가 수록됐다.
그가 순교자들의 행적을 증언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신심 깊은 가문이 있었다. 할머니가 ‘갸나’라는 세례명을 지닌 신자였다는 사실로 미뤄 볼 때, 그의 집안은 신유박해(1801년) 이전부터 신앙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특히 아버지 박 바오로는 훈련도감 포수로 일하며 여러 신자의 순교 현장을 목격했고, 비밀리에 순교자들의 시신을 수습하는 일을 맡았다.
박 바오로는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가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순교하자 목숨을 걸고 시신을 찾아내 왜고개(瓦署)에 안장했다. 그는 아버지를 통해 이 사실을 들었을 뿐 아니라, 김대건 신부가 서소문과 당고개를 거쳐 새남터 형장으로 끌려가는 모습도 목격했다.
이후 아버지의 뒤를 이어 훈련도감의 군인이 됐고, 병인박해 당시 순교 현장에 있었다. 그는 1866년 3월 새남터에서 순교한 제4대 조선교구장 성 베르뇌 주교, 성 브르트니에르 신부, 성 볼리외 신부, 성 우세영(알렉시오) 등 순교자 7위의 시신을 찾아 새남터 인근에 임시 매장한 뒤 왜고개에 안장했다. 또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성 남종삼(요한)과 성 최형(베드로)의 시신도 왜고개에 묻었다.

순교하지 못한 이가 선택한 보속의 길
그가 평생 순교자들의 증거자로 살아갈 수 있었던 배경에는 역설적으로 ‘살아남은 사람’으로서의 아픔도 있었다.
병인박해 한가운데 있었지만 검거망을 피해 살아남은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의 가족들은 순교의 길을 걸었다. 1866년 10월 고모 박 막달레나와 조카 박 바오로, 1868년 3월 아버지 박 바오로가 순교했다. 문헌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박순집 집안에서 순교한 이는 20여 명에 이른다.
증언록에는 그의 친인척을 비롯해 여러 순교자의 체포 과정과 신앙 고백, 순교에 이르는 모습이 담겨 있다. 순교자들이 형장으로 끌려가며 겪은 고통과 끝까지 신앙을 지킨 영광이 함께 기록됐다.
인천교회사연구소 부소장 김규성(요셉) 신부는 논문 「조선 천주교회의 순교자 관련 기록 연구」에서 그가 증언자로 살아간 배경에 대해 “집안에 순교의 영광을 얻은 이들이 많았지만 자신은 순교하지 못하고 살아남았기에 부끄러운 마음이 있었고, 이를 보속하고자 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