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마르 4,1-9; 마태 13,1-9; 루카 8,4-8)를 가만히 읽다 보면 이상한 점이 발견됩니다. 농부가 씨를 뿌리는 방식이 매우 비효율적입니다. 씨앗들의 운명을 그냥 바람에 맡기고 있습니다. 운이 아주 좋지 않다면, 잘 자랄 수 있는 좋은 땅에 떨어지지 못하고 낭비되는 씨앗들이 많을 수밖에 없겠죠. 보통의 농부라면 쓰지 않을 농사 방법입니다. 너무 이상해서 눈길을 끄는 이 비유는 ‘들음’에 관한 이야기인데, 말씀을 듣는 사람을 네 부류로 나누고 있습니다.
1.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말씀을 실천할 의욕을 꺾고 장애물을 놓는 사탄의 유혹에 걸려 넘어지는 사람들
2. 말씀을 기꺼이 듣기는 하지만 그 말씀이 뿌리를 내릴 시간을 주지 않고 몰이해, 곤궁함, 박해 등이 닥쳐오면 곧바로 말씀을 포기하는 사람들
3. 말씀을 듣기는 하는데 세속적 근심거리나 욕망에 뒤덮여 말씀이 그냥 사라져 버리게 두는 사람들
4. 말씀을 듣고 실천하여 열매를 맺는 사람들
네 번째 사람들은 신비를 깨달아 회개하여 구원을 얻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신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느님께서 우리의 귀를 건드려 주셔야 합니다. 육체적인 차원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영적인 청력을 아예 잃거나 약해지거나 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원인이 무엇이든, 우리는 자신의 힘만으로 귀를 치유할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귀를 열어주실 성령을 약속하셨습니다.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주실 것이다.(요한 14,26)
그렇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게 하신 성령은 충분히 우리의 귀를 제자의 귀로 바꾸어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영적 감각은 점점 날카로워지고, 하느님의 언어는 서서히 너울을 벗으며, 신비가 빛나기 시작합니다. 우리를 성령께 내어 맡길수록 우리는 예수님을 알게 됩니다. 예수께서 우리 안에 머무시게 되며, 우리는 볼 수 없는 것을 보며, 들을 수 없는 것을 듣게 됩니다. 그리하여 참된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예수께서 우리 안에 강생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낡은 인간, 귀먹고 눈먼 인간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그분의 부활과 함께 새 인간이 탄생합니다.
그리고 이 새 인간에게는 새로운 신분이 부여됩니다.
여러분을 자녀로 삼도록 해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는 것입니다.(로마 8,15)
이렇게 우리는 성령을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마지막으로 타인의 말을 듣는 것에 관하여 이야기할까 합니다.
이것은 일상적이면서도 신앙적인 일입니다. 모든 인간의 말은 성령을 증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곧, 다른 사람의 말을 통해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타인의 말을 듣는 사람은 하느님처럼 권능을 행사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판단하거나 가르치려 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사제이며 정신분석가인 모리스 벨레의 글이 올바른 들음의 자세에 대하여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듣는 것, 그것은 타인을 중심에 놓는 일입니다.
듣는 것, 그것은 타인에게 이렇게 말해주는 일입니다.
“당신은 저와 함께 있으면서 당신이 되고 싶은 사람이 되어도 좋아요.
어떤 경우에도 당신이 원하는 한, 저는 당신의 손을 놓지 않을 겁니다.”
들음에는 특별한 방법이나 규칙이 필요치 않습니다.
다만 어떤 말도 가로막지 말고 말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두세요.
머리만이 아니라 전 존재로 말하는 사람과 함께 하세요.
말을 해야 할 때는 제안하는 것을 자제하세요. 판단하지도 마세요.
타인이 자기의 언어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게 두세요.
하지만 거짓말의 악순환에 들어가는 것은 거부하세요.
타인의 말을 들을 때는 습득한 모든 지식을 잊으세요.
가진 모든 힘도 포기하세요. 어떤 지위도 뽐내지 마세요.
타인에 대한 어떤 기대도 드러내지 마세요.
이렇게 타인 앞에서 자신을 완전히 지우세요.
글 _ 함원식 신부 (이사야, 안동교구 농은수련원 원장, 성서신학 박사)
1999년 사제서품 후 성경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를 위해 프랑스로 유학, 파리 가톨릭대학교(Catholique de Paris)에서 2007년 ‘요나서 해석에서의 시와 설화의 상호의존성’을 주제로 석사학위를, 2017년 ‘욥기 내 다양한 문학 장르들 사이의 대화적 관계’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삽화 _ 김 사무엘
경희대학교 미술교육과를 졸업했다. 건축 디자이너이며, 제주아마추어미술인협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제주 중문, 강정, 삼양 등지에서 수채화 위주의 그림을 가르치고 있으며, 현재 건축 인테리어 회사인 Design SAM의 대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