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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0월, 복작대는 서울을 떠난 작가 이단원(다시아나, 77)씨는 경기도 양평 두물머리 인근에 정착했다. 유럽에서 15년 넘게 살다 귀국한 딸 부부와 함께였다. 그래서 서울 길음동본당에 있는 교적도 아직 옮기지 못했다.
때로 몽실거리는 안개로 몽환스러운, 때론 명징한 햇살이 신비스럽기조차 한 옥천리 들꽃마을에 꾸민 새로운 삶의 보금자리에 칩거하며 작가는 기존에 써놓았던 원고를 다시 꺼내들었다. 그리고 미뤄놓았던 원고를 첨삭해 장편을 탈고,
「저 건너 풀잎」이라는 표제로 신작소설을 냈다. 1997년 대구가톨릭대 총장 전석재 몬시뇰의 삶을 그린 전기소설 「노을이 지는 지평선 저쪽」(기쁜소식 펴냄)을 내놓은 지 무려 14년만이었다.
작품은 사실과 허구를 날줄과 씨줄로 촘촘히 엮어내린다. 대구광역시 북구 무태리 일대를 무대로, 1930년대 말 일제강점기부터 시작해 해방 공간과 6ㆍ25전쟁의 질곡을 거쳐 경제개발시기까지 그린다. 주인공은 26살에 3남매를 데리고 청상이 된 안노인으로, 일본 법정대를 나온 엘리트였음에도 망국의 비탄 속에서 독립운동의 길을 선택, 비명횡사한 남편을 그리며 평생을 수절한 여인이었다. 고결한 죽음도, 고뇌도 아는 이 없이 묻혀 푸른 청춘이 한갓 풀잎만도 못하게 된, 훗날에 와서는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는 죽음을 끌어안고 산 여인의 파란만장한 삶이 붓가는대로 그려진다. 그래서 자서전적 성격 전기 소설로 집필됐다.
작가의 말을 들어보자.
"10년쯤 됐을까요? 우연찮게 인천 이씨 집안 일가 아주머니를 신라 고찰 대구 파계사에서 만났는데, 이 산사에서 하룻밤 묵어간다는 것이 이 아주머니에 이끌려 나흘 밤을 지새다시피 했어요. 소설은 그 때 모색이 곱살하고 까무잡잡하고 잠삭한 그 안노인의 긴긴 얘기를 바탕으로 쓰게 됐지요. 자기 생애가 하도 기가 막혀 필력만 있다면 자신이 쓰고 싶었다고 했어요. 그 뒤로도 몇 번 찾아가 인터뷰해 받아쓰고 녹음을 해 소설로 썼는데 주인공 이소군 여사가 선종한 지 몇 년이나 지나 소설집으로 묶였네요. 다 딸의 권유 덕분이었지요."
하늘이 정수리를 내리치는 망부의 절망 속에서 의연히 필상을 끌어다 놓고 이별지를 써서 남편 가슴에 얹어주고, 청상의 외로움 속에서 시아버지를 공궤하고, 아랫사람에 정의를 베풀고, 자식들을 빼어나게 성취시키는 일대기가 노작가의 필치로 올올이 풀려나온다. 도쿄 유학시절부터 체포돼 고문을 당하고 고국에 돌아와서도 낭심에 철사를 꼽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고향 동산에 올라 들꽃을 꺾어 사랑하는 아내의 머리에 꽃아주며 신라 향가인 헌화가를 읊은 한 사내의 얘기가 가슴 절절히 그려진다.
작가는 "천륜 배반하기를 떡 먹듯 하고 사리사욕에 눈 먼 허다한 권세가들이 난무하는 세태에도, 온갖 간난신고 속에서 인간임을 벗어나지 않고 기품과 사랑, 용서의 지혜를 견지한 옛 사람들의 본보기가 있었다는 것을 아둔한 글솜씨로나마 비춰보고 싶었다"고 고백하고 "가능하다면, 그간 써놓았던 수필을 정리해 책으로 내고 싶은데 가능할지 모르겠다"고 말끝을 흐렸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