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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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 원로 주교의 삶과 신앙] 2. 두봉 주교(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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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대흥동본당 보좌로 사목했던 시절도 정말 신나게 하느님을 사랑하고 신자들과 사랑을 나누며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 활동 중 하나로 저는 레지오마리애 활동을 계기로 또 한 번 하느님의 섭리를 경험했습니다.

당시 본당 주임이신 오기선 신부님께선 본당 레지오마리애 창설을 계속 반대하셨는데요, 냉담 중인 예비신자 교리반 지도 어르신을 다시 성당으로 모시고 온다면 적극 지원하겠다고 선언하셨지요. 그런데 그 어르신은 마음의 문을 꼭꼭 닫고 누구의 말도 듣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는 어르신 때문에 오 신부님께서도 ‘돌대가리’라고까지 하시면서 엄청 화를 내셨고요. 저와 쁘레시디움 단원들은 누구보다 열심히 레지오마리애를 위해 준비를 이어왔지만, 어르신을 설득하는 일만큼은 쉽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 방문이 있었던 주간 주일, 제가 성당 마당에 서 있는데 어르신께서 성당으로 불쑥 들어오시더니 ‘성사를 주십시오’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이후 주임 신부님께서 레지오마리애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주신 것은 말할 나위 없었고요. 제가 어르신께 물어봤습니다. 단원들이 방문했을 때에도 안 오신다고 완강하게 말씀하시더니 어떻게 된 일이냐고요. 어르신께선 ‘뭐 은총이지. 은총으로 마음이 그냥 탁 바뀌던 걸요’라고 답하시는 겁니다. 정말 신나는 체험이었습니다.

대전에서는 본당 사목만이 아니라 가톨릭노동청년회를 창립하고 지도하는 활동도 했었는데요. 6·25 전쟁 이후 모두가 가난한 상황에서 집을 나와 길거리를 헤매거나 땅을 파서 움집을 짓고 사는 아이들도 많았던 시절이었습니다. 대전 선화동 다리 밑에도 그렇게 가출해 떠돌다가 모여 지내는 아이들 40여 명이 있었거든요. 가톨릭노동청년회 회원 청년들과 그 아이들을 찾아다니며 돕고 그 부모들을 설득해 다시 가정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활동했던 것도 참 뜻 깊었습니다. 먹을 것도 너무나 부족했던 시절이었지요. 본당 일을 하면서도 어떻게든 먹거리 문제 해결에 힘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어떻게 용기가 난 것인지 저도 잘 모르겠지만 당시 조치원읍에 땅을 구해 신자들과 논 개간사업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땅을 개간해 농사를 짓는 일은 말처럼 쉽지는 않았습니다.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땅을 일궈 수확의 기쁨을 맛봤던 경험은 잊기 어려울 듯합니다. 틈틈이 청년들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쳤던 시간도 좋은 추억이 됐고요. 또 MBC 라디오 ‘5분 명상’이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한 적이 있었는데요. 가난한 이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또 다른 통로로 저에겐 의미가 컸습니다. 그 프로그램은 인기도 많았어요. 가난하고 갖가지 어려움이 있어도 힘들다기 보다는 하느님 안에서 즐거웠던 시간이었습니다. 대전에선 교구 업무도 담당하며 하루하루 아주 재미있게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만 12년을 조금 넘게 대전에서 사목하다 1967년 8월, 파리외방전교회 한국지부장으로 선출됐어요. 지부장으로서의 소임에도 최선을 다해야 했기에 저는 대전을 떠나 전교회 지부가 옮겨간 서울로 이동했죠. 돌아보니, 결국 저는 본당 주임은 해보지 못하고 보좌로서 본당 사목 경험은 끝내야 했더라고요. 지부장으로 활동하던 기간 또한 2년이 채 되지 못했습니다.

1960년대 후반, 대구대교구는 경상북도 북부 지역 복음화를 전담할 새로운 교구 설립을 모색했었는데요. 보편교회 또한 복음화를 위한 필요성을 절감하고, 당시 바오로 6세 교황님께서는 안동교구를 설립했습니다. 1969년이었습니다. 갑자기 주한교황대사관에서 저를 찾더니, 교황님께서 안동교구 첫 교구장으로 저를 임명하신다는 소식을 전해주는 겁니다. 저는 ‘외국인 사제는 한국교회가 발전할 수 있도록 뒤에서 돕는 역할을 해야 한다’며 강하게 반대했습니다. 하지만 제 뜻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죠. 그래서 저는 새로 설립된 교구가 자리를 잡고 안정될 때까지 딱 10년만 교구장직을 맡겠다고 공언했죠. 이어 두 달쯤 후인 1969년 7월 저는 주교품을 받게 됐습니다.

아, 그런데 저는 주교 문장과 사목표어가 없습니다. 지금은 주교로 임명되면 당연히 정해야 하는 것으로 아는데요, 제가 주교가 되던 시절엔 꼭 그렇지 않았어요. 저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예전엔 귀족들이 문장을 만들어 가졌거든요. 제가 교구장 주교일 때는 특별한 사람이고 그렇지 않으면 평범한 사람이고 그런가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저는 하느님 앞에서 여러분과 똑같이 평범한 한 사람일 뿐이라는 생각에 문장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사목표어는요? 늘 하느님 뜻에 따라 가는 삶인데 별도의 어떤 것이 필요할까요? 굳이 언급을 하자면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 앞에서) ‘기쁘고 떳떳하게’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정리 주정아 기자 stella@catime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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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2-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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