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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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51)신앙은 어떻게 전수되고 교육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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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앙에 관한 하나의 상념

솔직하게 고백하면, 사람들이 신앙을 무엇이라 여기며 신앙하고 있는지 궁금할 때가 많다. 우리는 정말 신앙을 무엇이라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신앙은 하느님 초대에 대한 응답이다.” “신앙은 하느님께 인격적으로 귀의(歸依)하는 것이며, 하느님께서 계시하는 진리 전체에 대하여 자유로이 동의하는 것이다.” “신앙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움직여진 의지의 명령에 따라, 하느님의 진리에 동의하는 지성적 행위이다.” 「가톨릭교회 교리서」의 정의들이다. 분명히 맞는 말이지만, 뭔가 어렵고 추상적인 설명이다. 하느님의 초대에 응답하는 모습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 하느님께 인격적으로 귀의하는 것이 과연 어떤 모습인지, 거듭 질문해보아야 한다. 또한 신앙에 대한 교리서의 설명 안에는 지성적으로 동의하는 것이 강조되고 있다. 틀린 정의는 아니지만, 오늘의 관점에서 보면, 너무 지식인 중심주의적 편향이 드러난다. 이러한 정의 안에는 신앙의 교리화와 신학화의 한계가 보이기도 한다. 구체적 실재로서의 신앙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는 뜻이다. 지식인 신학자들의 오만과 좁은 이해 속에서, 신앙에 대한 설명이 너무 추상화되었다고 말하면 지나친 평가일까.


■ 구체적 실재로서 신앙

신앙은 신비이며 총체적이다. 신앙이 단순히 지성적 동의와 내면적 확신으로 축소될 수는 없다. 신앙은 다양한 형식으로 표출된다. 신앙은 하나의 특징적인 현상으로만 설명될 수 없고, 하나의 문장으로만 서술될 수도 없다. 교회 안에서 우리가 사용하는 신앙에 대한 모든 설명은 우리의 인식과 우리 언어의 한계를 드러낸다. 신앙의 총체성과 신비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신앙에 대해 정의하고 서술할 뿐이다. 이처럼 신비하고 완전하게 파악하기 어려운 신앙이지만, 신앙을 지닌 사람을 통해 우리는 신앙이 어떤 것인지 추측하고 상상해 볼 수 있다. 보이지 않는 신앙이지만 신앙을 지닌 사람을 통해 신앙은 겉으로 표현된다. 즉, 신앙은 그 사람의 신념과 행동과 태도 안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신앙하는 형태도 다양하다. 인간은 지성(이성, 사유)과 감정(마음, 정서, 느낌)과 의지(행위, 실천)를 지녔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할 때, 머리로 믿는 것, 마음으로 믿는 것, 몸으로 믿는 것, 삶으로 믿는 것은 뉘앙스의 차이가 있다. 하느님을 머리로 생각하는 것, 하느님을 마음으로 느끼고 체험하는 것, 하느님을 몸으로 감각하고 따르는 것, 하느님의 가르침에 따라 하느님을 닮은 삶을 사는 것은 차이가 있다. 신앙하는 방식 안에는 “지성의 길, 마음의 길, 실천의 길”(토마스 그룸) 모두 다 포함된다.

신앙은 하느님을 믿는 일이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이 단순히 ‘하느님이 존재한다’라는, ‘하느님이 우리를 창조했다’라는 명제에 동의하는 것일까. 그 명제적 진리를 그저 믿고 수용하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 그렇다면 신앙과 불신앙의 차이는 어떤 명제적 진실을 받아들이고 안 받아들이는 것의 차이에 불과한 것일까. 신앙은 단순히 지적 동의를 뜻하는 것일까. 물론 신앙한다는 것은 하느님께 동의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신앙한다’를 단순히 ‘동의한다’로만 치환하면 너무 좁은 이해다. ‘신앙한다’는 ‘동의한다’뿐만 아니라 ‘신뢰한다’, ‘충실하다’, ‘따른다’, ‘사랑한다’, ‘관계를 맺는다’ 등등의 숱한 동사들로 교체될 수 있다. 즉, 하느님을 신앙한다는 것은 하느님을 신뢰하고 하느님께 충실하고 하느님의 가르침에 따르는 것이며,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과 관계를 맺는 것을 뜻한다.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할 때, 그때의 ‘믿는다’는 ‘동의한다’는 뜻보다는 ‘따른다’, ‘닮는다’, ‘재현한다’는 의미가 더 강하다. 얼마 전 선종한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정의에 따르면,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 관계를 맺는 것”이다. 누군가와 인격적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그를 닮아서 일치한다는 의미다. 조금 단순하게 말하면, 신앙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일이다.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각과 시선과 신념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태도로 살아가는 일이다. 사람과 세상과 사건과 현상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시선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태도로 접근하는 일이다.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일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서 재현하는 일이며,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일이다.


■ 신앙 전수와 교육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것은 그를 사랑하는 일이며 그와 인격적 관계를 맺는 일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관계를 맺는 일이고 닮아가는 일이다. 신앙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고 재현하는 일이라면, 신앙을 배우고 전수하고 교육하는 방식도 거기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우리가 교리를 배우고, 성사 전례에 참여하고, 교회 공동체 안에서 친교와 봉사 활동을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서 기쁘고 행복하기 위해서다. 신앙의 구체적 실재에 대한 성찰과 질문을 던지지 않고, 그저 습관적으로 교리를 가르치고 배우고, 영혼 없이 종교적 관습을 수행하듯이 전례에 참여하고, 마지못해 본당 행사와 일에 참여한다면, 아무리 신앙의 세월이 길어진다고 해도 신앙은 성숙되지 않을 것이다. 교회 안에서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어떤 목적과 지향으로 이 일을 하는지, 즉, 예수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기 위해 이 일을 하고 있는지, 질문을 던져야 한다. 질문을 던지지 않으면, 자칫 하는 일 그 자체에 함몰되어 버릴 위험이 많다. 달은 사라지고 손가락만 남는다는 뜻이다.

예비신자 신앙교육과 신자 재교육의 방향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닮게 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교리와 신학과 이론 중심의 예비신자 교육이 시행되고, 영성과 신심을 살아내는 방식보다는 소비하는 방식으로 신자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이다. 신앙을 교리에서 시작하면 신앙이 이데올로기로 퇴락될 위험이 있다. 교리와 신학은 신앙을 위해 있는 것이지 그 자체를 위한 것은 아니다. 신앙을 전수하고 교육하기 위해서 교리와 신학은 필요하지만, 그 역할은 언제나 이차적이다.

배움과 지식만으로 인격이 전수되고 교육되지 않는다. 인격은 인격을 매개로 전수되고 교육된다. 신앙도 마찬가지다. 신앙은 신앙을 통해 전수되고 교육된다. 또 한편으로, 메시지의 내용만큼 그 메시지를 전달하는 매체와 방식이 중요하다. 신앙을 전하는 사람의 태도와 삶이 그리고 신앙을 전수하고 교육하는 방식이 신앙 전수와 교육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

신앙 전수와 교육에 대한 전반적인 재검토와 쇄신이 절실히 필요한 시절이다.


정희완 요한 사도 신부(가톨릭문화와신학연구소 소장)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23-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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