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위와 관계
우리는 서로를 동등하게 여기고 대하며 살아가는가. 남자와 여자, 인종과 민족, 돈과 권력과 지위, 나이의 많고 적음 등의 숱한 요인들이 대등한 관계를 방해한다. 부모와 자식, 선생과 학생, 직장 안에서의 직위, 본당 신부와 신자 등등의 다양한 구성적 요소들 역시 평등한 관계를 어렵게 한다. 사람들 사이에서 원초적 평등은 불가능한 것일까. 단지 관계 안에서의 공정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자본주의 세상에서 온갖 불평등과 차별을 우리는 목격한다. 오늘의 세상은 분명 민주주의 사회이지만 ‘법 앞에서 평등’이라는 말이 때때로 공허하게 느껴진다. 사실, 문명과 제도라는 측면에서 보면, 세상은 진보의 방향으로 움직여왔다. 하지만 그 이면의 실재를 살펴보면, 세상은 더 차별적이며 새로운 신분제 사회로 퇴행하고 있는 듯하다. 너무 음울한 진단일까.
공정하지 못하고 차별적인 세상에서 관계는 언제나 불평등하다. 오늘날 사람은 그가 서 있는 자리에 따라 평가되는 경우가 많다. 지위에 따라 대하는 방식이 달라진다는 의미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 안에서 ‘인격 대 인격’이라는 말은 그저 하나의 구호이자 레토릭(rhetoric)에 불과하다는 것을 현실에서 자주 발견한다.
■ 교회 안의 지위
사회적 지위와 교회적 지위의 차이는 무엇일까. 지위(또는 신분, status), 직위(position), 직무(job, duty, ministry)는 뉘앙스가 다르다. 오늘날 사회에서 흔히 지위의 차이는 신분의 차이라기보다는 직위와 직무의 차이를 뜻한다. 그렇다면 교회에서 성직자와 평신도의 차이는 지위와 신분의 차이일까, 아니면 직무와 역할의 차이일까. 성직자 안에서 교황, 추기경, 주교, 몬시뇰, 사제, 부제의 차이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신분의 차이일까, 직무의 차이일까.
얼마 전 신학교 입학 동창 두 사람이 나를 방문했다. 서로 다른 교구에 살고 있기에 오랜만에 즐겁게 이런저런 수다를 떨었다. 두 동창보다 내가 나이가 많아서 예전에는 편한 동생처럼 대했었다. 하지만 그중 한 사람이 주교가 되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존대하며 ‘주교님’이라는 호칭으로 불렀다. 우리들의 만남은 공적 관계의 예우와 사적 관계의 친밀성이 혼재한 시간이었다. 동창 주교님은 수다 떠는 내내 그래도 신학생 시절의 관계에서 발생한 호칭들을 버리지 않았다. “형은 어떻게 생각해, 그 형은 요즘 어떻게 지내?”라는 말들 안에서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주교라는 공적 지위와 직위와 직무를 사적 관계에 적용하지 않겠다는 의미였을까.
■ 교회의 위계적 구조와 문화
지위와 직위와 직무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을 동등한 인격으로 대하는 태도와 함께 협력하며 일하는 문화가 교회 안에 부족하고 낯설다는 인상을 받을 때가 있다. 또 한편으로, ‘시노달리타스는 민주적 합의제를 뜻하지 않는다’, ‘교회는 민주주의가 아니다’라는 말들을 교회 안에서 자주 듣는다. 틀린 말들이 아닐 수도 있지만, 섬세한 이해가 필요하다.
교회 안에 위계적 구조와 문화가 자리 잡은 배경에는 신학적, 제도적, 문화적 요인들이 작동하고 있다. “직무 사제직과 보편 사제직은 밀접한 관련이 있지만 ‘본질’이 다르다.” “주교품, 사제품, 부제품은 ‘품계’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주교는 그리스도의 대리자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 나오는 표현들이다. 직무는 봉사하기 위한 도구라고 교리서에 명시되어 있지만, ‘본질의 차이’, ‘품계’, ‘대리자’라는 개념들은 교회 안에 자연스럽게 위계적 서열과 질서의 문화를 낳았다. 교계제도(hierarchy)와 순명이라는 복음적 덕목에 대한 오해 역시 교회 안에 위계적 문화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작동되었다. 제도는 제도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사명 수행을 위한 것이다. 교계제도는 복음화라는 교회의 사명 수행을 위한 제도일 뿐이다. 순명은 공동체적 관계를 위한 덕목이다. 순명이라는 개념은 ‘순명하세요’라는 명령의 용법이 아니라 ‘순명합니다’라는 동의의 방식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교회의 제도가 내포하는 목적과 지향, 신앙의 덕목들이 적용되는 방식에 대한 깊은 이해가 절실히 요청된다.
공적 지위는 공적 관계에서만 작동되어야 한다. 교회 안의 지위는 세속적인 신분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사명 수행과 봉사와 섬김을 위한 도구일 뿐이다. 교회는 교회 고유의 작동 방식을 갖고 있다. 교회는 세속의 자본과 권력과 지위의 논리를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복음과 신앙의 방식, 즉 예수 그리스도의 태도와 방식으로 작동되어야 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태 20,26-27)
교회의 직무가 신분의 차이를 뜻하지는 않는다. 그가 어떤 직무를 수행하든 우리 모두는 그저 하느님 백성일 뿐이다. 성직자, 교계제도, 신앙적 덕목에 대한 교리와 신학의 이해가 아직은 위계적 특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그래도 조금씩 목적론적으로 이해의 방향이 바뀌어나가고 있다. 새로운 상상과 이해는 교회 삶의 방식과 문화를 조금씩 변화시킬 것이고 언젠가는 자연스럽게 제도와 규범도 변화될 것이다.
■ 친교(communion)
교회는 친교 공동체다. 교회의 친교는 단순히 민주주의적 관계에서 발생하는 차원을 훨씬 넘어서 있다. 교계적 친교는 삼위일체적 친교에 토대를 두고 있다. 삼위일체적 친교는 위계적 친교가 아니다. 교회는 신분적 위계 공동체가 아니라 하느님 백성의 친교 공동체다. 하지만 실제 현실에서 교회 공동체는 자주 위계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주교 임명이나 교구장 임명 기사를 보면 계급주의라는 인상을 받는다. 고위 성직자 기사일수록 전지전능한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가톨릭신문의 무게가 주교, 사제, 수도회에 치중돼 있다. 평신도 활동은 잘 보이지 않는다.” 가톨릭신문 편집자문위원회 회의에서 나온 발언들이다. 교회가 여전히 위계적 구조와 문화에서, 성직자 중심주의에서 잘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현실의 반영이다.
성직이 존재론적, 본질론적 신분의 차이를 뜻하지 않는다. 교계제도, 품계, 순명 등은 그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교회의 복음화 사명 수행을 위한 도구다. 진정한 친교는 위계적 서열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다양성과 역할의 차이를 인정하는 데서 발생하는 복음적 친밀성이다.
위계적 제도와 구조와 규범과 문화 속에서 오래 교육받으며 살아온 사람들이 한순간에 친교와 시노달리타스의 방식으로 변할 수는 없다. 오늘의 교회 구성원들이 진정한 친교와 시노달리타스와 신앙적 자율성을 머리와 마음과 몸에, 즉 삶으로 습득하기 위해서는 아마도 오랜 시간과 많은 노력이 요청될 것이다.
정희완 요한 사도 신부(가톨릭문화와신학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