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시기를 보내며 신자들은 정화된 마음으로 주님 부활 대축일을 맞이하기 위해 판공성사를 본다. 조금만 시간을 내면 손쉽게 판공성사를 볼 수 있는 오늘날의 우리와 달리, 사제를 만나기 어려웠던 신앙선조들에게는 단 한 번의 판공성사도 더없이 소중했다. 판공성사를 위해 바다를 건너고 육지를 걸었던 이가 있다. 바로 복자 김기량(펠릭스 베드로, 1816~1867)이다. 제주교구 김기량순교기념관을 찾아 그의 신앙 여정을 마주하고, 판공성사를 향한 신앙선조들의 열정을 되짚어본다.
하느님을 만난 바다 사나이, 제주에 복음의 씨앗 심다
넓은 바다를 가로지르는 돛단배에서 울려 퍼지는 노래. “어와 벗님들아 순교의 길로 나아가세… 나의 평생 소원은 천주와 성모 마리아를 섬기는 것이오. 밤낮으로 바라는 것은 천당뿐이로다. 펠릭스 베드로는 능히 주님 대전에 오르기를 바라옵나이다.”
제주도의 첫 신자이자 순교자인 복자 김기량(펠릭스 베드로)이 늘 불렀다는 천주가사다. 그는 제주 함덕 출신 무역상이었다. 1857년 2월 18일, 서귀포로 향하던 중 거센 풍랑을 만나 동료를 모두 잃었다. 홀로 한 달 넘게 표류하던 김기량을 중국 광동 해역에서 영국 상선이 구조했다. 홍콩에 도착한 김기량은 신원 확인을 위해 외국어에 능통했던 파리 외방 전교회 극동대표부로 인도됐다. 그곳에서 그는 병에 걸려 휴양 중이던 조선인 신학생 이만돌(바울리노)을 만나고 신앙에 눈뜬다. 이만돌에게 두 달간 교리를 배우고, 1857년 성령 강림 대축일에 루세이유 신부에게 ‘펠릭스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역경을 이기고 살아남은 그대는 행운(felix)의 사람이며, 신앙을 알지 못하는 제주 땅에서 믿음의 반석이 되라”는 뜻이다. 김기량은 “조선에 돌아가서 박해를 당해 죽을지도 모르지만, 하느님을 위해 죽는 것은 좋은 일”이라며 복음 선포를 다짐했다.
그는 1857년 6월 16일 홍콩을 출발해 1년 3개월 만에 제주로 귀환한다. 제주에 가기 전 김기량은 최양업(토마스) 신부를 만나기 위해 충북 배티 교우촌을 찾아갔다. 1858년 사순 제4주간에 김기량을 만난 페롱 신부와 최양업 신부는 천주교 서적과 성물을 건네주며 제주 복음화의 희망을 품었다.
신앙의 씨앗을 제주 땅에 심기 위해 김기량은 집안사람들 40여 명과 동료 사공들에게 열심히 전교했다. 제주에는 사제가 없었기 때문에 사공들을 육지로 데리고 나와 세례받도록 도왔다. 당시 제주도 사람들은 뱃사람 외에는 출륙(出陸)이 금지됐다. 김기량은 세례받지 못하는 가족들과 더 많은 이의 입교를 위해 선교사제 파견을 고대했다. 페롱 신부는 “김기량이 전국을 돌아다니며 거의 모든 선교사를 만났다”고 전한다.
1864년 김기량은 두 번째로 난파를 당하고, 일본 나가사키의 표류인 거주 구역에서 프티장 주교를 만났다. 자신을 살린 하느님의 섭리를 또 한 번 느낀 김기량은 귀국해 리델 신부를 찾아가 사공 두 명을 더 세례받게 했다. 병인박해가 발생한 1866년, 그는 통영 게섬에 갔다가 배에서 성물이 발견돼 붙잡혔다. 3개월간 문초를 받으면서도 배교하지 않았고, 곤장 60대를 맞고도 죽지 않자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김기량은 옥에서도 부활 신앙을 여러 번 밝혔다. 부활의 참뜻을 알지 못한 관아에서는 그의 가슴에 대못을 박아 육신이 다시 살아나지 못하게 했다. 김기량은 51세에 순교의 영광을 안고 그토록 바라던 천당을 향해 돛을 올렸다. 제주교구 신자들은 제주 복음화의 초석을 놓은 김기량의 신앙과 순교 정신을 현양하며 시복시성운동을 전개해 왔고, 그는 2014년 시복됐다. 교구는 같은 해 천주교 순례길 ‘김기량길’을 개장, 지난해 4월에는 김기량순교기념관을 개관했다.
지극한 정성으로 판공성사에 임해
김기량의 신앙 열정을 보여주는 사례는 그가 판공성사를 위해 바다를 건넜다는 점이다. 최양업 신부는 김기량이 육지에 와서 베르뇌 주교에게 판공성사를 받았다고 전한다.(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1858년 10월 12일자 편지) 김기량은 1859년에도 서울에 가서 봄 판공을 받았다. “바다 고운 것을 믿지 말라”는 뱃사람들의 속담처럼 바닷길은 늘 변화무쌍해 침몰과 표류로 목숨을 잃는 사람이 많았다. 김기량순교기념관 송해경(가타리나) 선교사는 “오로지 판공성사만을 위해 뭍으로 나간 것은 굳은 신앙심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라며 “과거에는 뱃길이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어려웠고, 좋은 바람을 기다려야 했기 때문에 성사를 받고 제주로 다시 들어오는 데 한 달은 걸렸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복자 김기량뿐만 아니라 우리 신앙선조들은 판공성사를 간절히 바라고 소중히 여겼다. 주님 부활 대축일 전에는 ‘봄 판공’을, 주님 성탄 대축일 전에는 ‘가을 판공’을 받았다. 판공은 ‘힘써 노력하여 공을 세운다’(辦功)는 뜻과 ‘공로를 헤아려 판단한다’(判功)는 뜻을 갖고 있다. 공로를 갖추고 주님 만날 준비를 한다는 의미다.
지금은 판공성사가 고해성사 하나로 간소화됐지만, 박해시대에 판공은 사제와 신자의 교리문답, 고해성사, 미사로 이뤄졌다. 사제들은 신자들의 공로를 확인하기 위해 교리문답을 철저히 시행했고, 영적인 발전이 있는지 헤아린 후 고해성사를 받게 했다. 신자들의 영혼을 살피며, 은혜로운 고해성사에 온전히 참여토록 도우려는 뜻이었다. 오늘날 신자들은 성사표를 배부받고 고해 후 제출하지만, 과거에는 찰고(擦考)를 통과한 신자만이 성사표를 받고 고해성사를 볼 수 있었다. 성사표는 교리문답과 신앙 점검을 모두 통과했다는 기쁨의 증서였다.
신앙선조들은 판공을 받기 위해 먼 길 마다하지 않고 사제를 찾아갔다. 사제들도 봄과 가을에 판공을 주기 위해 교우촌과 공소 곳곳을 돌아다녔다. 「기해일기」에는 성녀 이영희(막달레나)의 가족이 판공을 보기 위해 매년 서울로 상경했다고 기록돼 있다. 「베르뇌 주교 서한집」에는 신자들이 오랜 시간 기다리다가 판공을 받지 못하면 밤중에라도 자신을 찾아와 판공을 보려고 애썼고, 죄를 하나하나 헤아리며 진실로 통회했다고 적혀 있다. “비신자 남편을 둔 여교우들은 주위 모든 사람이 잠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몰래 빠져나와 신자의 의무를 다했고, 또 한밤중에 와서 판공성사를 보고 새벽 3시에 봉헌하는 미사에 참례한 후 기쁜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며 돌아갔다.”
김기량순교기념관 관장 정필종(도미니코) 신부는 “오늘날 신자들은 판공성사를 귀하게 여기고 진지하게 임했던 신앙선조들을 본받아야 한다”며 “의무감으로 고해하기보다, 나 자신과 이웃에게 저지른 죄를 진실하게 뉘우치며 깨끗한 마음으로 주님 부활 대축일을 기쁘게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염지유 기자 gu@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