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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한마음한몸 자살예방센터 공동기획 ‘우리는 모두 하나’] (23) 부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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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유가족 모임은 마치 세상의 모든 슬픔과 고통을 집약한 곳이 여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형언하기 어려운 유가족의 아픔을 바라보면서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것인지 헤아려보았습니다.

자살사망자 역시 보통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죽기 전까지는 어떤 형태로든 살길을 찾습니다. 문제는 살길을 찾는 과정에서 타인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마음이 커 모든 것을 혼자 감당하려 하고, 누군가 도움을 주려 해도 근원적 해결에는 한계가 있다고 미리 판단하고 거부합니다. 가까운 사람의 힘든 면이 먼저 눈에 들어오기 때문에 자신의 어려움에 대해서는 털어놓지 못합니다. 오히려 가까운 사람들을 도우려는 말과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역설적이지만 인간은 혼자 책임질 수 없는 문제일수록 어떻게든 홀로 책임지려고 합니다. 놀라운 것은 문제가 점점 커지는 상황에서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능력도 향상된다고 착각하고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결국 살길을 찾다가 죽음에 다다르게 되고 그동안 자신이 해왔던 노력을 표현하는 방법은 죽음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상황에 이릅니다. 이 국면에서 죽음은 자기 한계의 암시이자 자기표현의 한 형태로 보입니다. 여기까지 오게 되면 안타깝게도 가족들도 보호 요인이 되기 어렵습니다.

자기 고통에 몰입하고 있어 아무리 의미 있고 깊은 관계에 있다 하더라도 그러한 관계성으로 생각을 역전시키기가 어렵습니다. 한마디로 자신 아닌 다른 누구에게도 아무런 생각, 어떤 감흥도 없는 상태(alexithymia)가 됩니다. 이는 가족을 염려하지 않거나 무시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자신이 처해있는 고통에 압도되어 있어서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고통 외에 다른 것은 모두 다 무화(無化)시키고, 궁극적으로는 고통을 느끼는 주체인 자신도 무화시키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동안 유가족이 고인에게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주었고, 유가족과의 관계성 속에서 고인이 살아왔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그 어떤 관계와 다를 바 없이, 그 관계를 통해 유가족과 고인은 기쁨, 슬픔, 위로, 상처를 주고받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고인의 죽음에 상실감을 느끼고 그토록 오래 슬퍼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동시에 고인의 죽음이 전적으로 유가족의 소관이 아니라는 것 역시 분명합니다. 자살로 사망한 고인에게 유가족이 끼쳤던 영향은, 다양한 형태로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에게 평소 그 가족들이 준 영향과 다르지 않습니다. 죽음의 형태가 다르긴 하지만 자살유가족 역시 평범한 사람들이기에 자신이 여느 가족들과 다른 특별한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한다면 착각입니다.

자살로 사망한 고인은 남은 가족을 원망하거나 죄책감에 시달리게 하려고 죽음을 택한 것이 아닙니다. 고인은 자신만이 체감하는 고유한 고통의 무게를 죽음이라는 형식으로 덜어내고자 한 것입니다. 그 고통 역시 고인 안에서 생성, 성장한 것이어서 고인조차도 그 규모를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어떻게 보면 고인에게 가장 감당이 되지 않는 것은 고인 자신이었을 것입니다. 모순된 자신을 견디고 짊어지지 못한 것이 죽음을 초래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부디, 자살유가족은 나락(那落)의 구덩이에서 나와야 합니다. 자신이 다른 유가족들과 다르지 않다는 평범함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야 수인(囚人)의 삶을 끝낼 수 있습니다.

황순찬 베드로 교수
인하대학교 사회복지학과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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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3-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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