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노달리타스, 끊기지 않는 희망의 맥박
시노달리타스에 시달리느라 탈이 났다고 말한다. 어느 날 위에서 날아온 과제를 완수하기 위해 주어진 빈칸을 부지런히 메꾸는 형세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제시한 시노달리타스 사업(?)이 요구한 문서 만들기를 완수하기에 모두 바쁘다. 교회의 선교 사명을 완수하기 위한 희망의 지평을 열라는 초대장이 과제 지시서로 받아들여진 모습을 자주 본다.
여전히 많은 신자가 시노달리타스 개념의 번역어를 요구한다. 바람직한 문제의식이다. 초대장보다 과제 지시서로 느껴지는 이면에 외국어라는 낯섦이 자리잡기 때문이다. 그런데 외국어이기에 좀 더 모호한 채 많은 느낌을 담아볼 여지를 발견할 수 있다. 가장 주요하게는 희망의 느낌을 들 수 있고, 여기에 우애, 기쁨, 자식이기에 받아 안은 묵직하고 뿌듯한 정체성 등을 더해볼 수 있다.
시노달리타스는 희망의 몸짓이다. 이 희망은 벽에 그려진 창과 문이 아니다. 시노달리타스는 마주 앉아 경청하며 함께 알아차린 껄끄러운 지점을 드러내는 불편함을 피하지 않는다. 교회이기에 마주서야 하고, 고민해야 하며, 해결해야 할 과제를 식별하는 일은 갈등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 그 예로, 최근 세계 곳곳의 교회가 현장 문제를 비치며 제기했던 문제, 동성 결합, 사제독신제, 교회 통치에 관한 교회법의 개정 요구를 들 수 있다.
시노달리타스가 불러온 자유의 바람이 잘 정돈되고, 먼지 하나 없이 닦아놓은 장소를 망가뜨린다는 비판은 이런 분위기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바로 이 흐트러짐과 싸움처럼 보일 수 있는 큰 목소리에서 시노달리타스의 실체를 감지한다. 이는 현재 우리가 목격하고 우리에게 들리는 시노달리타스의 노력이 간신히 얌전한 모습을 유지하던 교회가 위험에 빠졌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갈등으로 인한 아픔은 함께 걸어가야 하는 동료에게 느끼는 감정이다. 따로 걸어도, 다름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관계는 친구라고 말하지 않는다. 시노달리타스 과정에서 마주하는 갈등은 어떻게든 친교를 활성화하려는 이들의 노력과 이 때문에 결코 쉽게 벗어던지지 않고 묵묵히 감수하는 쓰라림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화성악을 예외 없이 지키며 그려낸 인위적인 악보보다는 불협화음처럼 들릴 수 있는 생생한 현장의 목소리가 시노달리타스의 참모습이다. 친구의 자리를 포기하지 않는 시노달리타스가 미래를 향한 문을 희망의 색채로 드러낸다.
시노달리타스는 기쁨이다. 많은 학자가 언급하기 이전에 모든 신자는 시노달리타스를 알고 있었다. 이는 시노달리타스가 다름 아닌 교회의 본질, 곧 친교와 참여, 그리고 선교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 낯선 개념이 우리에게 던져지기 이전에 교회가 지향하고 걸어온 모든 여정은 시노달리타스가 말하는 바로 그 지점이다. 오늘날의 시노달리타스 노력이 기쁨인 이유는 그 여정의 의미와 가치, 교회다움의 의미를 다시 한번 분명하게 확인시켜 주기 때문이다.
200주년 사목회의 의안이 각인한 한국교회의 모습은 이제는 현장에서 사라진 과거의 기록이 아니다. 지금도 한국교회다움을 지칭하는 모습으로 현존하고, 많은 이들이 교회를 떠나게 하는 요소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시노달리타스 논의는 ‘한국교회’(Korea Church)라는 독립된 섬에서 벗어나 한국에서 뿌리내린 신앙을 증거하는 ‘한국의 교회’(Church of Korea)로 가는 길로 우리를 인도한다. 로마보다 더 로마스러운 교회임을 은근히 자랑하는 자화상은 더 이상 자리 잡을 곳이 없다.
시노달리타스는 그리스도의 자녀에게 부여된 자랑스러운 과제이다. 세상과 함께, 세상 안에서, 세상을 통해 구원자이심을 드러내시는 그리스도가 시노달리타스 노력 안에 더욱 또렷이 나타난다. 과학기술 발전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아파하며 죽어가는 형제 지구를 지켜주기 위해 무엇을 자발적으로 희생하고 어디서 발걸음을 멈추고 되돌아서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자리가 시노달리타스의 자리이다.
시노달리타스의 무게중심은 교회 안의 권위 배분이 어떻게 하면 민주적이고, 동등한 방식을 형성할까를 묻는 지점에 있지 않다. 매우 중요한 이 사안은 세상과 함께 구원의 길을 걸어가려는 교회의 임무인 선교를 방해하는 요소를 제거하려는 노력의 일부에 자리 잡는다. 더욱 근본적인 과제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선포하고 구원의 기쁨으로 초대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시노달리타스 노력이 본질적으로 선교적인 교회의 모습을 밝히 드러낼 때 교회의 심장 소리를 힘차게 들려줄 수 있다. 이 맥박이 피동적이고 습관에 젖어버린 우리 믿음살이에 강한 여운을 미치며 그리스도교 진리가 지닌 파동을 우리 안에 공명시킨다. 이럴 때만이 시노달리타스는 결코 멈추지 않는 역동성으로, 일회적인 과제 완수 기억을 넘어 초대교회의 심장 박동을 오늘 여기서 들려줄 것이다.
과거의 기억에 사로잡혀 시노달리타스를 외면한다면 교회는 새로운 교회이며 동시에 교회의 진정한 전통을 가장 잘 실현하는 교회로 변화될 수 없다. 회의론에 머물러 한 걸음 물러서기보다, 껄끄러워도 서로의 속내를 말하고, 왜 이 문제를 그냥 넘길 수 없는지를 복음에 비추며 함께 복음화의 길을 걸어가자.
시노달리타스가 우리에게 공명시킨 성령의 맥박에 언제나 귀를 기울이자. 과제를 제출하고 시원한 마음으로 이제 다시 잘 정돈된 기계적인 화성악으로 되돌아가려는 노력과 이 맥박이 충돌할 때 시노달리타스는 과제가 아닌 초대장으로 끊임없이 작용할 것이다. 시노달리타스는 희망의 몸짓, 교회다움을 실현하는 노력이다. 쉬지 말고 함께 신나는 교회, 세상과 함께 달리는 교회로 살아가자. 시노달리타스는 교회가 존재하는 한, 절대 바래지 않는 초대장이다. 신나게 달리자는 성령의 친교 초대장이다.
심상태 요한 세례자 몬시뇰(수원교구 원로사목자·한국그리스도사상연구소 명예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