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당 현실에 대한 정직한 진단
본당들이 코로나 이전의 상태로 돌아오고 있다고 한다. 물론 코로나 이전의 상태로 완벽하게 돌아오지는 못했고, 또 완전하게 복구되지 않을 수도 있다.
예전에는 본당에서 많은 것들이 이루어졌다. 신자들이 본당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요즘엔 주일미사 참례 외에는 신자들이 본당에서 보내는 시간이 거의 없는 것 같다. 신자들이 참여하는 외적 시간의 양이 본당의 활력을 가늠하는 척도가 될 수는 없다. 하지만 본당이 그저 미사만 참례하는 장소로 그친다면 조금 슬픈 일이다.
현대 사회의 개인주의와 물질주의의 영향으로 사람들은 공동체에 대해 점점 무관심하고 내적 기쁨보다는 외적이고 물질적인 쾌락에 더 많은 무게를 두고 살아간다. 또한 현대 자본주의의 가장 큰 특성인 소비주의의 성향은 신앙마저도 소비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게 한다. 이러한 경향 속에서 신자들에게 본당 생활은 자칫 귀찮은 제약과 구속으로 느껴지게 한다. 사실, 예전에 비하면 본당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 수준이 훨씬 낮아졌다. 이 낮아진 기대 수준과 종교에 대한 사람들의 건강한 욕망과 바람을 채워주지 못하는 본당 구조가 서로 맞물려 더욱 본당의 활력을 떨어지게 하고 있다.
사제 한 사람이 수백 명의 신자를 사목적으로 돌본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신자 대다수는 그저 주일미사에만 영혼 없이 참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공동체적 봉사와 헌신보다는 기복적이고 자기 위안만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신앙생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신앙과 영성에 관한 지속적인 교육의 부재와 소수 중심의 본당 운영이 신자들을 자꾸만 수동적이고 타성적인 본당 생활을 하도록 몰고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 신앙의 인정 공동체
교회는 신앙 안에서 모든 타인을 인정하고 포용하는 공동체다. 타자의 건강한 관심과 인정은 고단한 생의 여정에서 우리에게 위로와 힘을 주기도 한다. 타자와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이상 우리는 타인의 관심과 사랑과 인정을 요청한다. 건강한 관심과 사랑과 인정은 우리를 주체가 되게 하고 성장하게 한다.
모든 단체와 공동체 안에는 어떤 형태로든지 인정시스템이 작동되고 있다. 때로는 감정적 친밀성이, 때로는 혈연적 관계가, 때로는 다양한 인연의 깊이가 인정시스템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하지만 세속의 일반적 인정시스템은 대부분 자본과 권력과 능력에 기반한다. 교회가 된다는 것은 신앙의 인정 공동체가 된다는 뜻이다. 초기교회 시절 교회 공동체는 독특한 인정시스템 덕분에 사람들에게 매력적이었다. 세속의 인정 방식이 아닌 오직 신앙 안에서 서로에게 관심과 사랑과 인정을 실천했다. 부자든 가난한 이든, 귀족이든 노예이든, 신앙 안에서 형제자매로 살아갔다.
오늘의 본당 공동체 안에는 어떤 방식의 인정시스템이 작동되고 있는가? 오직 신앙 안에서 서로에 대한 인정이 이루어지고 있는가? 혹시 세속의 인정시스템이 본당 안에서도 그대로 작동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리스도교 신앙의 올바른 인정시스템을 우리는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
■ 작은 공동체, 영적 동반
대형화와 외적 성장을 추구해 왔던 교회의 방식이 변해야 한다. 미래의 신앙생활은 작은 공동체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사람들이 정서적으로 소속감과 친밀성을 느낄 수 있는 물리적 반경은 그리 넓지 않다. 소규모의 모임을 중심으로 하는 친밀성과 친교의 신앙 공동체가 절실히 요청된다.
대형 집회 형식의 신앙 모임은 줄어들 것이다. 작은 모임들이 확산되어 좀 더 큰 모임으로 발전할 수는 있지만, 잘 모르는 사람들이 모여 처음부터 대형 집회를 형성하는 것은 점점 불가능해진다. 물론 스포츠와 엔터테인먼트 영역에서 발생하는 대형 집회가 종교 행사에서도 어느 정도 가능할 수 있다. 하지만 행사는 언제나 행사에서 끝난다. 행사가 어떤 자극을 줄 수도 있지만, 행사를 통해 결성되는 신앙 공동체는 없다. 진정한 신앙 공동체는 언제나 일상의 삶을 기반으로 형성되는 것이다.
코로나 팬데믹의 경험은 교회의 작은 공동체 운동을 촉진시키는 역설적인 매개체가 될 수도 있다. 성당이라는 고정적인 공간을 중심으로 신앙생활이 전개되기보다는 일상의 다양한 삶의 자리에서 신앙이 수행될 것이다.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그 자리가 공동체가 되고 교회가 될 것이다. 미래의 본당은 이 작은 공동체들을 통합하고 연대하게 하는 매개의 역할을 수행하게 될 것이다.
본당 사목 역시 작은 공동체 형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진정한 만남과 대화와 친교는 언제나 소규모로서만 가능하다. 대형 집회 형식의 성사 집행만 이루어진다면, 또한 신자들의 종교심이 인격적 신앙으로 변혁되지 않는다면, 즉 신자들의 신앙이 본당의 영역에서만 작동되고 삶의 모든 자리에서 작동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교는 그저 문화적 종교로 전락하고 만다.(토마시 할리크 「그리스도교의 오후」 참조) 신앙의 친교와 인격적 친밀성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작은 공동체 형식의 성사 거행, 함께하는 신앙 교육과 공부, 개인적인 영적 동반이 이루어져야 한다.
특히 “개인적인 영적 동반 직무는 교회의 가장 중요하고 가장 필요한 사목 과제가 될 것이다.”(토마시 할리크) 영적 동행의 지향과 목적은 세상과 자기 삶에 대한 관상적 태도를 기르는 것이다. 영적 동행을 수행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 자신이 영적이고 관상적인 사람이 돼야 한다. 영적 동반의 직무가 성직자에게만, 또는 특수 사목의 영역으로만 축소되어서는 안 된다. 영적 동반의 직무는 모든 신앙인이 수행해야 할 직무다.
■ 새로운 형식의 공동체
현대 사회에서 신앙의 현존과 카리스마를 발산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가 필요하다. 전통적인 본당 공동체의 형식만으로는 현대 사회의 도전에 잘 대응하지 못할 것이다. 사실, 오늘날 수도원 공동체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이상(理想)이 다시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본당이라는 형식을 포기하지는 못할 것이다. 본당의 본질과 목적과 지향을 다시 살아낼 수 있는 본당 구성과 운영의 새로운 형식과 내용이 절실히 요청된다.
언젠가는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 즉 성직자와 평신도가 함께 공동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새로운 중심이 등장할 것이다. “특히 영성과 영적 동반을 위한 센터들이”(토마시 할리크) 사목과 신앙생활의 중심이 될지도 모른다. 미래의 본당은 전례와 성사의 거행뿐만 아니라, 하느님 백성들 간의 시노달리타스적 만남과 대화, 진정한 신앙 교육과 영적 양성과 동반, 공동체적 친교와 세상을 향한 봉사와 자선이 이루어지는 곳이어야 할 것이다.
정희완 요한 사도 신부(가톨릭문화와신학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