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 젊은 교사가 스스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자신이 수업하던 교실 한편에 있는 준비실에서 목을 매 사망했습니다.
대개 자살 장소는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자신의 교실에서 사망했다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교사 외에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동시에 자신이 그토록 소중하게 생각하는 교사의 역할이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 갔음을 의미합니다.
자택이 아닌 교실을 선택한 것은 본인의 선택이 단순히 개인적인 죽음으로 치부되지 않기를 바라는 의지 표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살 방법으로 목맴을 선택했다는 것은, 그만큼 절박하고 결연(決然)했음을 의미합니다.
인간이 하는 모든 행위는 상황에 대한 반응이고, 다른 행위들에 대한 응답일 수 있습니다. 젊은 교사는 자신의 정체성을 어린 학생들의 조력자로 설정하고, 어떻게든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노력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최선과는 무관하게 다른 기대치가 적용되고 한계를 넘는 요구들로 어느새 무력한 조력자가 되어버린 자신을 발견하고 좌절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좌절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러한 좌절조차도 표현할 수 없고 수용될 수 없는 상황이 더 깊은 절망을 가져왔을 수 있습니다.
젊은 교사는 자신의 짧은 교직 생활을 통해 자신의 전(全) 교직 생활을 압축적으로 선경험(先經驗)했을 수 있습니다. 교육에 필요한 최소한의 보장도 없는 상황에서 이타성과 헌신에 대한 강요만을 느꼈을 수 있습니다.
일방적으로 요구되는 텅 빈 관계 속에서, 변화하든 변화하지 않든 책망하고 책임 전가하는 사람들만을 경험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원래의 나로서는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발견했을 수 있습니다. 내가 진정 내가 되기를 원했고 그래서 선택했던 교직이었는데 말입니다.
20대 중반의 젊은 교사에게 우리가 고도의 사회성과 탁월한 대처 능력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여성주의 철학자 키테이(Kittay)가 「돌봄: 사랑의 노동」에서 ‘둘리아(doulia)의 원칙’을 언급한 것처럼 교직에 막 들어선 교사 역시 산모(産母) 같은 존재로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산모를 돌보는 사람(고대 그리스에서 ‘doula’라고 함)이 산모를 잘 돌봐주어야만, 산모가 아이에게 온전한 돌봄을 제공할 수 있듯이, 누군가를 돌보는 사람도 또 누군가의 돌봄을 받아야 합니다.
또한 산모와 아이 사이의 고유한 관계가 방해받지 않아야 안정적 애착 형성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야 교사를 통해 학생들은 집에서 미처 배우지 못한 것을 학교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어쩌면 지금의 교육 상황은 정말 중요한 것들을 집에서도 배우지 못하고, 학교에서도 배울 수 없게 만드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젊은 교사의 죽음을 애도하는 가운데, 마음속에서 ‘한계’(백예린)라는 곡이 겹쳐졌습니다.
“내가 원하는 나의 모습과 네가/ 필요로 하는 나의 모습이 같지가 않다는 것/ 잘못된 건 아니지 않나요./ 미안할 일 아니지 않나요./ … / 난 몇 마디의 말과 몇 번의 손짓에/ 또 몇 개의 표정과 흐르는 마음에/ 울고 웃는 그런 나약한 인간일 뿐인데/ … / 내가 줄 수 있는 것 그 이상을/ 줄 수 없음에 미안해해야 하는 건/ 이제 그만둘래요.”
황순찬 베드로 교수
인하대학교 사회복지학과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