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부터 폭우로 큰 고생을 하자마자 곧바로 폭염이 이어지고 태풍도 그 어느 때보다 드세게 불어닥쳤다. 아침부터 30도를 넘나들어 바깥에 나가는 것도 선뜻 내키지 않는다. 흰색 옷보다 헐렁한 검은색 옷을 입는 게 체내의 열기를 내보는 데 좋다는 얘기를 듣고는 옷 입는 것에도 신경이 쓰인다. 지구 곳곳에서 물과 불과의 생존 투쟁이 가혹하다. 기후변화가 현실이고 또 무척 위험하다는 사실은 대부분이 느끼고는 있다. 그렇지만 여전히 어떤 삶의 방식과 행동을 선택해 살아가야 할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우리는 지금 지난 300만 년 동안 지구 대기에서는 전혀 볼 수 없었던 최고치의 이산화탄소 농도를 지닌 환경에서 살고 있다. 지구 대기에서 극소량인 이산화탄소는 온실가스 구성분의 반 이상을 차지하며 대기의 열을 가두어 지구를 뜨겁게 달군다. 대부분 화석연료에서 나오는 이산화탄소와 함께 온실가스가 계속 증가하면 지구 환경은 지금까지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치명적인 붕괴로 이어진다. 우리와 생태환경은 공속의 관계여서 서로 연결되어 있고 의존해 있다. 인간능력과 생태 세계의 오용과 남용이 온갖 소중한 생명들을 위협한다. ‘지속가능한 성장’이라는 애매한 환상 대신 그 너머를 생각해야 하는 때이다.
지금은 위기의 시대이니만큼, 응답과 책무의 시대이기도 하다. 세상을 혼란에 빠뜨린 팬데믹은 부와 빈곤 사이의 불공평한 격차가 얼마나 파괴적인가를 보여 주면서 동시에 모든 사람이 안전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안전하지 않다는 것도 드러냈다. 기후변화 같은 구조적인 사회문제는 ‘개인적 선행의 총합’으로는 해결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생태적 시민’으로 태어나기 위한 내적 전환, 즉 생태적 회개와 생태적 습관의 형성 없이는 시작할 수도 없는 문제이다.(프란치스코 교황 「찬미받으소서」 211-219항)
내가 어떤 ‘생활방식’을 살아가는가가 생태적 회심의 척도이다. 겸손과 단순함으로 살아가는가? 세상의 아픔보다 내 이익이 더 큰 것인가? 큰 집, 좋은 차, 넓은 땅이 인생의 목표인가? 기후위기는 우리 각자에게 심각한 실존적 질문을 던진다. 이 위기는 정치, 정책, 과학, 기술의 영역이기도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인간이 위기의 역사 안에서 끊임없이 마주하는 영적이고 윤리적 문제이다. 편하고 안락한 소비주의 ‘라이프스타일’이야말로 이 위기의 한가운데 있다.
니사의 그레고리오 성인은 우리의 탐식이 온갖 이기심으로 이어지는 모습을 이렇게 보여준다. “미식가라는 사람들은 물고기와 바다 밑을 기어 다니는 생명까지 끌어냅니다. 굴을 약탈하고 문어를 바위에서 뽑아내어 패대기칩니다. 그러나 남용하지 마십시오! 바오로 사도는 그렇게 가르칩니다. 온화한 휴식 속에서 안식을 찾으십시오. 쾌락의 광란에 빠지지 마십시오. 자신을 파괴자로 만들지 마십시오. 어떤 생명체든 결코 죽이지 마십시오.”(‘선행에 대하여’)
우리가 전통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금욕을 실천하라는 말이 아니다. ‘금욕(asceticism)’의 어원은 ‘실천, 연습’을 뜻하는 그리스어 ‘아스케시스(askesis)’에서 나왔다. 무엇을 포기한다기보다, 끊임없이 훈련하고 연습한다는 뜻이다. 복음서에서 제자들이 재산을 포기하고 단식을 하며 욕망을 버리고 어디론가 물러서며 수행한 일 모두가 ‘훈련’이다. 그 과정이야 어렵지만, 이들은 기쁨 안에서 삶의 연습을 수행했다. 하느님 나라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바라신 세상은 사치와 남용과 안일함의 세상이 아니다. 지금 있는 그대로의 상태에, 지배적인 체제의 생활양식에 근본적으로 저항하고 도전하는 것이 진짜 ‘금욕의 라이프스타일’이다. 그것이 세상을 바꾼다.
박상훈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