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날이었습니다. 자살 시도자를 보호하고 있다는 경찰의 연락을 받고 파출소로 가 L을 만났습니다.
경찰은 L이 차도 주위를 한동안 서성이다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차들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는 것입니다. L은 그저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습니다. 30살이 넘은 나이였음에도 왠지 L은 길 잃은 어린아이 같았습니다.
그 후 매주 한 번씩 몇 개월간 L과의 상담이 이루어졌습니다. L은 동해안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고, L이 아주 어렸을 때 아버지는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L이 초등학교에 다니고 몇 해가 지난 뒤, 어머니마저 인근 소도시로 돈을 벌기 위해 여동생만을 데리고 집을 떠났습니다. 시골집에 L만 홀로 남겨졌습니다. 채 10살밖에 안 됐던 L은 집 앞 2차선 도로를 쌩쌩 달리는 차를 보면 뛰어들고 싶었고, 도로 건너 출렁이는 바다를 보면 그곳에 빠져 영원히 삶이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주변 친척분들이 가끔 찾아와주셨고 학교에 가면 친구들도 있었지만, 사람들과 헤어져 혼자 있게 되면 더 깊은 공허와 우울감이 찾아왔습니다.
중·고교를 졸업하고 일을 찾아 서울로 왔지만, L은 항상 혼자였습니다. 여러 번 이성 친구를 사귀었지만,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상대에게 집착하고, 관심이 조금만 소홀해져도 자신이 버려졌다는 생각에 감정이 요동쳐 어깃장을 놓았습니다. 여자친구를 속박하면 할수록 관계는 멀어졌고, 여자친구가 자신 아닌 타인과 즐거운 대화를 나누거나 다른 일에 몰두하면 질투를 넘어 비애, 분노가 올라왔습니다.
L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타인의 말 한마디에도 상처받고 생사의 갈림길을 오가는 극단적인 마음을 가졌습니다. 사람들에게 기대했던 인정이 오지 않으면 또다시 상처받고 타인에게 더 냉정해지고 사소한 것에도 마음이 틀어져 관계를 단절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L은 홀로 남겨졌던 시골집의 그 아이로 되돌아갔고, 자신을 방치한 부모님을 원망하고 자신의 삶을 한탄했습니다.
어슐러 K. 르 귄(Ursula K. Le Guin)의 단편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에는 모두가 행복하게 살아가는 오멜라스가 나오고, 한 명의 아이가 갇힌 채 고통을 겪어야만 그곳의 행복이 유지될 수 있게 돼 있습니다. 대부분은 아이의 존재를 알면서도 도외시한 채 살아갑니다. 오직 소수만이 그곳을 떠납니다.
L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어쩌면 L이 오멜라스의 아이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일치하는 면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오멜라스의 사람들은 우리와 너무 흡사합니다.
고통 당하는 아이를 보면서도 어쩔 수 없는 현실로 치부하고 살아가는 사람들과 그 아이를 보면서 아파하긴 하지만, 별다른 도움을 줄 수 없기에 그 자리를 떠나간 사람들 모두, 우리의 자화상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상담 후, L 역시 ‘오멜라스의 아이’를 자신이 학대하고 방치한 자기 표상으로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그 아이에게 손을 내밀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자신의 상처, 유기(遺棄) 불안으로 인해 사람들이 자신에게 할 수 있는 그 이상을 요구하지 않기로 한계 설정을 했습니다.
그리고 채워지지 않는 결핍이 순간순간 만들어내는 고통을 알아차리고 인내하면서 성장하지 못한 아이의 손을 잡고 세상 한복판으로 조금씩 나아가기 시작했습니다.
황순찬 베드로 교수
인하대학교 사회복지학과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