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유명 방송인이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공황장애를 앓고 있음을 밝혔습니다. 그전까지 대중들에게 공황장애란 미지의 영역이었고 사회적 책임을 피하려는 사람들의 핑계로만 여겨졌는데, 그 사건 이후 공황장애란 무엇이고 어떤 고통을 받는지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공황장애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고 이전까지 사람들 앞에서 드러내지 못하던 환자들이 하나씩 자신을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처지가 바뀐 것은 없었지만 사람들의 인식이 달라지고 알아주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자살자는 한 해에도 1만3000명이 넘으며 이는 IMF 이후 꾸준히 증가했습니다. 자살의 고통은 자살자의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남겨진 이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칩니다. 한 사람의 자살에는 가족이나 정서적으로 연결된 주변 사람들이 약 20명 정도가 있는데, 이들을 ‘자살유가족’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한 해에만 약 20만 명의 자살유가족이 발생할 것이라 추정되며, 매년 누적된 것을 볼 때 대한민국 사회 전체가 거대한 유가족 사회가 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수에도 불구하고 자살유가족들을 주변에서 찾아보기는 어렵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자살은 말할 수 없는 죽음인지도 모릅니다.
자살유가족은 가까운 사람의 고통을 알아채주지 못하고 죽음을 예측하지 못했다고 여겨 스스로에게 수치심과 죄책감을 가지게 되고 때문에 주변에 드러내기 어렵게 됩니다. 심지어는 가족 안에서도 그 죽음을 알리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동시에 이러한 고통을 주는 고인에 대해 배신감과 분노라는 상반된 감정이 일어나고 이러한 복잡하고 모순된 내면은 더욱 주변에 말을 하기 어렵게 만듭니다. 더구나 사회적으로 자살유가족들을 문제 있는 사람들로 보는 낙인까지 더해져 모든 것을 혼자서 감내하는 고통을 경험하게 됩니다. 가까운 사이마저도 자살 사건 이후 다가가기를 망설이고 관계가 멀어지는데 이러한 고립은 유가족들을 또 다른 위험으로 몰아넣기도 합니다.
자살유가족을 영어권에서는 ‘Suicide survivor’라고 부릅니다. ‘아직 자살로부터 살아있는 사람들’이란 의미이고, 또 그런 상태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요즘 많은 사람들이 남들 보기엔 멀쩡해 보이지만 속은 감당하기 어려운 외로움을 느끼고, 고통이 반복되다가 이젠 무디어져서 “나 힘들어”라는 말 한마디조차 꺼내기 어려워합니다. 힘들다는 말을 하면 듣는 이들을 힘들게 하진 않을까 하는 걱정까지 얹어서 말입니다.
그러다 큰 어려움을 당하고 나면 어느 누구도 찾지 못하고 모든 걸 혼자 감내하다 쓰러져 마지막 결정까지 홀로 안고 가는 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다들 이미 감당할 수 없는 상황임에도 힘들지 않은 척하는 것이 이 시대의 예의이고 미덕이 되어버린걸까요?
비록 당장은 해결이 어렵더라도 말만이라도 “나 정말 힘들어”라고 할 수 있고, 주변은 그러한 말에 귀기울여 들어줄 수 있는 사회 분위기가 된다면 얼마 좋을까요? 그조차 못하고 있다면 우리 모두도 ‘자살생존자’ 인지도 모릅니다.
차바우나 바오로 신부
서울성모병원 영성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