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6년 조불수호조약 이후 프랑스 선교사들은 치외법권의 보호 안에서 선교활동을 하게 됐다. ‘서양 오랑캐’를 뜻하는 양이(洋夷)에서 귀빈이라는 의미의 양대인(洋大人)으로 호칭이 바뀌고, 옷도 상복에서 수단(soutane)으로 성직자 신분을 드러냈다. 선교사들의 지위가 높아지자 일부 천주교 신자들은 그들의 위세를 이용하여 비신자들과 갈등을 일으키기도 했다. 교민(敎民)이라고 불리던 천주교 신자들과 평민(平民)이라 불리던 비신자들 사이의 갈등 안에는, 조선 정부의 부패한 탐관오리들로부터 자신들의 재산을 서로 지키기 위한 사회적인 문제도 함께 포함되어 있었다. 이처럼 교우와 백성 사이에서 벌어진 분쟁을 가리켜 ‘교안(敎案)’이라고 부른다. 어떠한 변혁의 시기에 그 사회가 안정을 찾기까지 동요의 시기가 있기 마련이다. 교안의 시대는 바로 종교와 선교 자유를 향한 과도기라고 할 수 있다.
교안의 정의는 다양하게 서술되지만, 보통 천주교 신자들과 비신자들 간의 분쟁으로 인한 사건을 총칭한다. 대체로 선교사와 지방관료의 협상으로 타결됐지만, 갈등이 굵어져 대한제국과 프랑스와의 외교적 절충으로 해결된 사례도 많았다. 교안의 시기는 일반적으로 1886년 조불조약 이후부터 1905년 대한제국이 외교권을 박탈당하는 을사늑약이 맺어지는 때까지로 보고 있다. 그 원인은 매우 복합적이지만 몇 가지로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개항 초기에는 긴 박해기간 동안 형성된 천주교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서양에 대한 반감이 일반 백성들에게 깔렸었다. 이들이 오랫동안 사교(邪敎)로 간주해온 천주교에 대해 반감을 품고 행패를 부리는 일이 많이 일어났다. 둘째, 신자와 비신자 사이의 분쟁에 신부가 개입해 월권을 행사하기도 했다. 선교사들은 조불조약 이후 4~5년간 신자들을 보호하고자 적극적으로 나섰다. 셋째, 천주교 예식이 조선의 전통적인 관습과 충돌하는 면이 있었다. 일부 신자들은 미신을 타파한다는 이유로 신당(神堂)을 부수기도 했다. 넷째, 묘지와 산을 둘러싼 논쟁이 신자와 비신자 사이에 벌어져 교안으로 확대되기도 했다. 또 조세 및 토지 거래 등의 경제적 사건에 교회가 휘말리는 경우가 있었다. 다섯째, 조불조약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일부 지방 관료의 지시로 서양인을 미워하는 분위기가 형성되는 경우도 있었다. 끝으로 선교사가 치외법권을 누리고 교회가 성장해 가는 과정에서 신자임을 내세워 불법과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교안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1886~1905년 20년간 ‘교안’ 수백 건 발생
수백 건 정도 일어난 것으로 알려진 ‘교안’을 유형별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유형은 선교사가 중심에 있던 교안이다. 선교사들 가운데는 선교 활동 중에 폭행을 당한 이들이 있었다. 조불조약에 의해서 선교사들은 통행증인 ‘호조(護照)’만 있으면 치외법권을 누리면서 어디든 다닐 수 있었다. 그럼에도 천주교에 반감을 품은 이들은 선교사와 그들을 돕는 신자들에게 폭력을 가하기도 했다. 이러한 폭력은 서양인 자체에 대한 반감과 유언비어가 그 원인이 되었다. 예를 들어 서울과 지방에서 ‘외국인이 갓난아이를 잡아먹는다’는 등의 괴기스러운 소문이 유포되기도 했다. 이러한 소문은 ‘외국인 혐오증’으로 발전했고, 프랑스 선교사들도 그 혐오 대상에 속했다. 이는 아마도 천주교의 성영회(聖?會)를 통한 보육원 운영과 시약소(施藥所) 활동을 곡해해 ‘갓난아이의 눈으로 약을 만든다’는 나쁜 소문을 퍼트린 데서 ㅂㅣ롯된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 신부들이 호신용으로 휴대한 육혈포(六穴砲, 6연발 리볼버 권총) 등 무기의 존재가 소동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예컨대 경북 칠곡에서는 파이야스(C. Pailhasse) 신부가 소지하던 총포를 김오권이라는 인물이 발포해 상습 전과자인 김축이를 살해한 사건이 있었다. 이러한 폭력은 법에 어긋나는 일이었으므로 외교 문제로 비화하는 교안으로 확대됐다.
둘째 유형은 신자들 사이의 문제에 선교사가 개입해 벌어진 사건이다. 프랑스 선교사들은 신자들이 징수당하는 과도한 세금에 대해 국가를 상대로 변호하고 중재했다. 이에 신자들은 토지·세금·금전 거래 등을 둘러싼 일마다 선교사의 힘을 빌리고자 했다. 선교사 입장에서는 오랫동안 박해를 당했으며 당시에도 여전히 약자였던 신자를 보호하기 위한 인도적 배려의 차원이 컸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나타난 신자들의 탈선은 교회 내 새로운 문제를 일으켰다. 선교사가 가진 외교적 특권을 자의적으로 이용하고자 한 것이다. 이런 의도를 품은 일부 신자들로 야기된 문제들을 ‘교폐(敎弊)’라고 부른다.
1901년 제주교안으로 천주교 신자 희생
셋째 유형은 신자와 비신자 사이의 문제에 선교사가 개입한 교안이다. 이 경우에는 신자들이 피해를 본 경우도 있고, 비신자들을 가해한 사례도 있다. 이러한 교안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1901년 발생한 ‘제주교안’(신축교안)이다. 주동자 이름을 따 ‘이재수의 난’이라고도 부른다. 교안 시기 천주교 신자 가운데는 관료들의 핍박이나 사회적 모순 속에서 자신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교회에 의지하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신앙보다는 현실적인 이익에 눈이 멀어 교인(敎人)이라고 자칭하고 다니며 폐해를 일으키는 이들도 존재했다. 물론 교안의 원인을 어느 한 가지로만 볼 수는 없다. 제주 교안의 경우도 당시 중앙에서 파견된 봉세관(封稅官)의 과도한 수취에 대한 제주 민인(民人)들의 항거와 일부 신자들이 선교사의 힘에 기댄 교폐 등이 맞물려서 벌어진 일이었다. 그 과정에서 죄 없는 천주교 신자들이 살해당하기도 했다.
교안이 일어나던 이 시기에도 한국 교회 신자 수는 상당히 늘어났다. 경제적인 어려움 속에서 서양의 힘에 기대려고 입교하는 이들이 많은 것도 이유였다. 이러한 행태를 가리켜 ‘양대인자세(洋大人藉勢)’, 곧 ‘서양인의 특권을 이용하여 권세를 부린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나 교안 시기에 천주교가 성장한 근본요인은 현실적 목적이 아니었다. 복음이 전파되는 상황에서 천주교회와 그 신앙을 알게 되는 기회가 더 많아짐으로써, 교회의 위상이 이전보다 높아졌기 때문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