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미 예수님. 요즘 여행 트렌드는 ‘한 달 살이’라고 합니다. 스위스·프랑스·하와이 같은 해외에서 혹은 국내의 조용한 시골 마을에서 한 달을 머무는 거지요. 일상을 벗어나 낯선 곳에서 살아보는 경험, 누군가는 그것을 새로운 버킷리스트라 부르기도 합니다.
저는 어딘가로 떠나지는 못하지만, 저만의 ‘한 달 살이’를 살아갑니다. 몸의 기능을 하나둘 내려놓는 병의 시간 속에서 한 달에 한 번 찾아오는 주님의 몸은 제게 ‘한 달 살이’의 양식이 됩니다.
저는 침대에 누운 채로 하루를 살아갑니다. 호흡기를 단 채, 머리맡에 놓인 태블릿 하나로 바깥세상과 연결됩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하느님의 손길이 숨어 있습니다.
몸의 대부분은 움직일 수 없지만, 아직 남아 있는 잔존 근육. 네 손가락, 그 손끝으로 기도하고, 글을 쓰고, 누군가에게 마음을 전합니다.
저는 미사에 함께하지 못하지만, 한 달에 한 번 찾아오는 주님의 몸은 저를 성찬의 중심으로 다시 불러 세웁니다. 그날, 신부님께서 집으로 오셔서 제게 ‘그리스도의 몸’을 주실 때, 병든 제 삶에도 성체의 은총이 흘러듭니다. 그 순간, 제 방은 성전이 되고 제 육신은 거룩한 제대가 됩니다.
그 시간은 일상 중 가장 고요하지만 가장 충만한 시간입니다. 그날 이후의 시간은 ‘살아지는 시간’이라기보다 ‘살아내야 할 시간’입니다. 봉성체로 채워진 하루는 저에게 다음 만남까지 살아낼 이유와 힘을 줍니다. 저는 그날을 중심으로 살고, 그날을 기다리며 기도합니다. 삶에서부터 부활을 누리지 못한다면, 그리스도 부활의 증언자라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 조각의 빵에 담긴 말씀과 사랑이 제 하루하루를 버티게 해 줍니다. 그 작은 성체 안에 하늘의 생명이 담겨 있다는 사실이 제 병든 하루를 새롭게 비추어 줍니다. 봉성체가 없다면 저는 어디에 중심을 둘 수 있을까요. 중심 없는 날들은 허공을 떠도는 듯합니다.
가끔은 주님의 몸이 제 안에 들어오면, 병든 제 몸도 하느님 형상으로 새로워지는 듯합니다. 고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고통에 방향이 생깁니다. 이 고통은 끝이 아니라 통로가 됩니다. 그 고통을 제대처럼 봉헌하며, 고통 너머를 바라보게 됩니다. 그것은 부활의 약속을 향한 믿음의 시선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의 피를 마시고 “주님의 피로 저를 씻어주십시오”하고 고백할 때 예수님께서는 우리 몸을 통해 당신이 친히 육화하실 겁니다.
이 한 달은 그렇게 봉성체로 이어지고, 견뎌지고, 살아냅니다. 제게 봉성체는 단순한 의무가 아니라, 은총의 양식이며, 살아낼 수 있는 ‘영적인 빵’입니다. 주님께서 친히 내 몸 안으로 오시는 이 만남 안에서 저는 다시금 그리스도의 몸으로 살아갑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한 달, 그것이 바로 저만의 성지순례입니다.
“그리스도의 몸”, “아멘.”
신선비(미카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