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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체성혈대축일 특별기고] 윤지섭(요셉‘신앙의 눈으로 본 수학’피정 강사)

성체성사 안에 숨겨진 수학의 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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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체성혈대축일이다. 교회는 성찬례를 ‘그리스도인의 생활 전체의 원천이요 절정’(교회헌장 11항)이라고 표현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은 이 신앙의 신비에 예절과 기도를 통해 의식적으로 경건하게 능동적으로 참여해야 한다’(전례헌장 48항)고 강조한다. 그만큼 성체는 영원한 생명과 구원을 보장해주는 살아있는 음식이다.

그런데 직업 탓일까. 난 이 성체 신비를 묵상할 때 마다 수학을 떠올린다. 하느님 사랑이 얼마나 크기에 매일 당신 몸을 나누어 주셔도 모자람이 없는 걸까. 혹시 그렇게 많이 나누어 주다 보면 ‘그리스도의 몸’도 사실은 아주 조금씩 줄어드는 것은 아닐까.

‘일주일 안에 있는 각 요일’을 집합을 A라고 할 때 수학적 기호로는 A={월, 화, 수, 목, 금, 토, 일}이 된다. 마찬가지로 구약성서 앞부분 7권을 집합 B라고 할 때 이를 수학적 기호로 표현하면 B={창세기, 탈출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여호수아, 판관기}가 된다. 여기서 A와 B는 원소 수가 7개로 똑같아 ‘일대일 대응’을 시킬 수 있다<그림 1 참조>. 뒤집어 말하면 (지극히 상식적인 말이지만) 일대일 대응이 되면 두 집합은 같은 개수(농도)의 원소를 갖는다.

그런데 이런 ‘상식’이 무한의 개념에서는 달라진다. 탈출기 10장과 16장에 나오는 메뚜기와 만나를 예로 들어보자. ‘무한히 많은 메뚜기’(집합 C)와 ‘무한히 많은 만나’(집합 D)가 있다<그림 2>. 여기서 메뚜기 하나 하나와 만나 하나 하나는 모두 일대일 대응이 된다. 따라서 같은 개수의 원소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상황을 조금 바꿔보자. <그림 3>처럼 대응 방법을 바꿔보는 것이다. 메뚜기 한 마리만 남기고 나머지를 모두 대응시켜도 ‘무한 집합’에서는 일대일 대응이 된다. 메뚜기 두 마리를 남기고 대응을 시켜도, 세 마리를 남기고 대응을 시켜도 마찬가지다. 결과적으로 무한히 많은 메뚜기를 남긴 상태에서 만나와 대응을 시켜도 메뚜기와 만나는 서로 일대일 대응이 가능하다. 분명 만나가 메뚜기보다는 수가 적어야 하는데, 일대일 대응이 되기에 둘 다 원소의 수가 같다는 결론이 나온다.

메뚜기와 만나 대신 수를 이용해 보자. 자연수 집합과 짝수 집합 사이도 일대일 대응이 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자연수와 홀수 사이에도 일대 일 대응이 가능하다. 여기서 자연수는 ‘1, 2, 3, 4, 5, …’와 같은 일반 수이고 짝수는 말 그대로 ‘2, 4, 6 …’, 홀수는 ‘1, 3, 5, 7 …’이다. 여기서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짝수와 홀수는 분명히 자연수의 한 부분인데, 자연수와 일대일 대응이 되는 것이다. 결국 자연수와 짝수, 혹은 자연수와 홀수는 원소 수가 같다는 결론이 나온다. 짝수가 분명 자연수의 한 부분인데 자연수와 원소 수가 같은 것이다.

이처럼 무한의 개념에서는 우리의 상식이 깨진다. 성체의 신비도 마찬가지다. 무한한 하느님의 사랑에서 무한한 사랑을 덜어내도 하느님은 무한한 하느님(사랑) 그 자체이시다. 유한한 것을 반으로 나누면 처음 것의 절반이 되지만 무한은 반으로 나누어도 그대로 무한이다.

성체 신비를 묵상하기 어렵다는 것은 우리가 바로 이 무한의 개념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눈 앞에 보이는 ‘유한한 것’에 대한 생각을 잠시 접어두고 조용히 앉아서 성체 안에 담긴‘무한의 신비’에 대해 묵상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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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07-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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