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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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영 평화칼럼] 하나 더 보태지길

이소영 베로니카(제주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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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후연구원으로 파리에 머물던 십수 년 전, 가끔 시간 되면 연구소로 출근하는 길목에 자리한 성당을 들르곤 했다. 평소보다 일찍 나온 바람에 미사 시작에 앞서 도착했던 어느 아침이었다. 문을 밀고 들어서니 교구 신부님들이 아침기도(laudes)를 시작하시려던 참이었다. 뒤편에 엉거주춤 선 내게 한 신부님이 다가와 뭐라 뭐라 하셨다. 이 책 보며 함께 기도하겠느냐 권하시는 것까진 이해했으나 이어진 문장은 짧은 불어 실력으로 알아들을 수 없었다. 고요한 공기를 가르며 신부님들의 눈길이 일제히 이쪽으로 향했고, 당황한 나는 건네주신 책을 탁 밀쳐내며 “제 불어는 이 문헌을 감당할 만큼에 미처 이르지 못했습니다”라고 ‘영어’로 답했다.

‘불어 못합니다’ 정도의 불어는 사실 구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왜 굳이 ‘문헌을 감당할 만큼에’ 식의 쓸데없이 복잡한 표현을 사용했던 걸까. ‘불어 못해도 가방끈은 긴 사람’으로 각인되고 싶었던 걸까. 내 방어적 허영심이 부끄러웠고, 무안하게 해드렸던 게 죄송했다. 그날 오후 난 내가 아는 어휘들로 구사할 수 있는 수준에선 가장 예의 바른 불어로 아침의 일을 사과드리는 쪽지를 썼고, 귀갓길에 성당 우편함에 쏙 넣어뒀다. 며칠 후 출근하며 그 길목을 지나다 신부님을 다시 뵈었다. 고개 숙이고 지나치려던 내 어깨를 톡톡 치며 “너였구나?” 웃더니 이번엔 영어로 말을 건네셨다. 책이 있으면 미사 따라가기가 한결 수월할 거라며 영어와 불어·라틴어가 나란히 적힌 전례서(missel)를 선물로 주겠다고 하셨다. 그렇게 그날 처음 앙투완 신부님과 이야기를 나눴다.

서툰 외국어라도 텍스트의 표면만 스치는 설명과 텍스트를 꿰뚫는 설명은 어렴풋이 구분해낼 수 있었고, 신부님의 강론은 후자 쪽이라 난 느꼈다. 한 문장이라도 더 이해하고 싶어, 세미나 휴식 시간에 농담을 못 알아들을 때나 과자점에서 빵 이름을 못 알아들을 때보다 더욱 귀를 쫑긋한 채 집중해 들었다. 못 알아듣는 나와 잘 안 들으시던 할머니 몇 분, 그리고 수녀님만을 청자로 한 소규모 평일 미사에서도 그분의 강론은 남루한 옷차림 안에 형형하게 빛을 발하는 아름다운 얼굴 같았다.

전례서를 선물 받았던 아침이었다. 사제관에 올라가 책을 찾아올 동안 저쪽 벤치에서 잠시 기다려달라 하셨다. 거기 오도카니 앉아 발끝으로 땅을 톡톡 치며 기다리는데 봄날의 햇살 속에서 어떤 기억이, 나만 아는, 내 살결의 살결 같은 기억이 마음을 휘감았다. 순간 난 이것이 이런 종류의 기쁨으론 마지막이 돼야겠구나 싶었다. 나이테를 더해갈 어느 시점 이후론 가지면 어울리지 않을 감정들이 존재하니까. 언제까지고 ‘좋은 선생님께 사랑받는 학생’의 위치일 수 없으니까.

귀국을 앞두고 그간 감사했다고 인사드리자 신부님이 말씀하셨다. 때론 미처 모르는 사이, 자격을 못 갖췄음에도, 신의 은총이 그런 한 사제를 통해 누군가에게로 물처럼 흘러들기도 한다고. 어쩌면 당시 내 감사함 안엔 소통하고픈 갈망이나 일방적 진심 같은 불순한 감정도 함께 들러붙어 있었을지 모르겠다. 저 순간이 저토록 각별하게 각인되었던 것 또한 다른 누군가에 대한 다른 기억이 겹쳐졌기 때문이며, 미사 못 따라 하던 외국인에게 한 프랑스 사제가 베푼 단순한 호의 때문만은 아니었을 테다.

타인을 위한 기도의 밑바닥엔 종종 상대에게 자신이 어떤 흔적으로 남고 싶은 자기애가 깃들곤 한다 들었다. 내 기도 또한 그렇겠지. 부디 그 불순물일랑 걷히고 깨끗하고 순정한 것만 남아 신부님께 주어질 축복에 하나 더 보태지면 좋겠다. 구글링해보니 지금은 파리 외곽 작은 본당 주임사제로 계신 듯하다. 다시 뵐 수 있을지는 하느님만 아실 거다. 나중에 천상에서 마주치면 기억하고 “너였구나?” 웃어주시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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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4-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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