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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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해, 뿌리 깊은 나무가 되어] 1. 말씀으로 시작되는 신앙 <4>"집어라, 읽어라!" (끝)

힐링 원하는 시대, 사랑의 치유 "성경"에 귀 기울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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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은 말씀 그 자체이시다.
성경을 읽어야만 예수님을 알 수 있다. 이힘 기자 lensman@pbc.co.kr
 
#강아지 언어

 인간은 인간의 언어를 쓰고, 강아지는 강아지 말을 쓴다. 서로 말이 안 통하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같이 있으면 자꾸 정이 쌓인다. 무릎에 턱을 고이면 뭔가 주고 싶고, 혀 내밀고 꼬리를 흔들면 쓰다듬어 주고 싶어진다.

 강아지 마음을 좀 더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강아지의 언어를 이해하면 가능하다. 집에 혼자 있을 때 심하게 어지른다면, 물건을 입에 물고 놓아주질 않는다면, 다가와서 주인 얼굴을 핥는다면, `아, 이런 뜻이구나`하고 알게 되는 것이다.

 식사는 정해진 시간에 주지 않는 것이 좋고, 외출이나 귀가할 때 인사 안 하는 것이 좋다. 밥 시간이 되면 마음이 조급해져 화가 나게 되고, 나갈 때 이별 예고를 알아들은 강아지는 초조해진다. 인간의 입장이 아니라 강아지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사랑하니까.

 하느님은 거룩하고 순수한 영이시다. 하지만 썩을 육신을 취해 오셨다. 하느님은 말이 필요 없는 분이다. 하지만 `말씀`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 왜 그랬을까? 좋아하니까, 예뻐 죽겠으니까 어떻게든 같아지고 싶었던 것이다.

 눈높이로 내려와 앉은 사랑. 인간이 알아들을 방법과 언어로 인간의 말로 표현된 하느님의 마음, 그것이 말씀이다. 인간의 글로 표현된 하느님 사랑, 그것이 성경이다.


 
▲ 강아지를 이해하려면 강아지가 알아듣는 말과 행동으로 표현해야 한다.
하느님은 인간을 사랑한 나머지 인간의 언어로 말씀하셨다.
그것이 성경이다.
한 소녀가 애완견에 입을 맞추고 있다. [CNS 자료사진]
 
 
 #말씀과 신앙

 `신앙의 해`다. 굳은 믿음을 가지자는 것이다. 세속화와 허약한 신앙을 극복하자는 말이다. 많은 사람이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고백한다. 마음에 와 닿지 않은 채 몸만 오간다고 고민한다. 믿음이 없다고 푸념한다. 왜 그럴까?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환경이 그렇기 때문이다.

 신앙을 말하기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다. 믿음은 약한 사람이나 찾는 위로라고 말한다. 종교가 없는 것이 지성인의 자격처럼 여겨진다. 정신보다 물질이 우선시되는 사회. 실패보다 성공이 미화되는 세상.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을 압도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하느님을 느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굳은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뿌리 깊은 나무가 될 수 있을까? 책을 읽어야 한다. 말씀을 섭취해야 한다. 하느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분이 어떤 분인지 알아야 한다. 하느님에 대해 완전히 알려주신 분.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님은 말씀 자체이시다. 구약은 예수님을 약속한 책이고, 신약은 예수님을 증언한 책이다. 예수님을 알면 하느님을 아는 것과 같다. 결국, 성경을 읽지 않고 하느님을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하느님 사랑을 알고 보답하지 않는 것도 불가능하다.

 우리가 주인의 사랑을 알게 되면 그분의 계명을 지키게 될 것이다. 우리를 위해 희생하셨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우리를 위해 영생을 얻으셨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그분 말을 듣게 될 것이다. "앉아!" 하면 앉고, "일어서!"하면 일어설 것이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진리를 찾아 방황했다. 젊은 시절 수사학을 배워 출세하기를 원했다. 마니교에 심취해 어머니 속을 썩여드렸다. 하지만 어떤 곳에서도 목마름이 가시지 않았다. 어머니 모니카 성녀의 헌신적 사랑. 스승 암브로시오의 자애로운 보살핌. 어느 날 창밖에서 들려오는 아이들 목소리.

 "집어라, 읽어라, 집어라, 읽어라."
 가서 읽으면 된다. 집어 먹으면 된다. "너 사람의 아들아, 내가 너에게 하는 말을 들어라. 저 반항의 집안처럼 반항하는 자가 되지 마라. 그리고 입을 벌려 내가 너에게 주는 것을 받아먹어라"(에제 2,8). 신앙은 의무가 아니다. 진리를 따르는 인간의 보편적 선택이다.
 
 #말씀 씨앗과 세상이란 땅

 말씀이 뿌려질 씨앗이라면, 세상은 씨앗이 움트는 토양이다. 복음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세상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 교회가 존재하는 곳은 천상이 아니라 세상이다. 세상이 구사하는 언어를 익히고 소통해야 한다. 적극 경청하고 쉽게 말해야 한다.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 하느님 나라를 가르치셨다. 가난한 과부와 배고픈 소작인도 알아듣는 말씀이었다.

 "교회는 이러한 인간 사회에 현존해야 한다. 교회는 그 사회에서 살아가거나 그 사회에 파견된 자기 자녀들을 통해 현존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존경과 사랑으로 저 사람들과 함께 어우러져야 하며, 그들이 살아가는 인간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자신을 인식해야 하고, 온갖 인간적 교류와 활동을 통해 사회 문화생활에 참여해야 한다. 또 그들의 민족적, 종교적 전통에 익숙해져야 하고 그들 안에 감추어진 말씀의 씨앗을 기꺼이 존경하는 마음으로 찾아내야 한다"(「교회의 선교활동에 관한 교령」 2항).

 하지만 오늘날 교회가 처한 환경은 낙관적이지만은 않다. 개인과 무관해진 신앙, 문화로 대체된 종교의 시대를 살고 있다. 모차르트나 바흐의 곡을 들으면서도 그들 신앙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가우디의 건축에 흥미를 느끼면서도 그의 종교와는 거리를 둔다. 그들 예술이 신앙 속에서 꽃피운 결정체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말씀의 힐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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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3-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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