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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를 보내주십시오] 박문수 신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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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속한 산업화가 진행되던 1970~1980년대 한국. 오직 ‘빨리 선진국이 돼야 한다’는 일념으로 밀어붙여지기만 하던 사회에서 도시빈민, 철거민, 가난한 사람들은 하루가 다르게 들어서는 마천루,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드리우는 그림자 뒤로 철저히 가려져야 했다.
맹목적 개발주의 가치관 하에 인간의 존엄함을 모르던 그 시대 한국 땅에서 빈민들과 동반하며 변화를 외쳐온 미국 출신 사제가 있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가난한 이들의 터전으로 들어가 ‘동행’하는 예수를 보여줬던, 빈민 운동가이자 사회학 연구자 예수회 박문수 신부(Francis Xavier Buchmeier·프란치스코·83)의 선교 여정을 소개한다.



■ 이웃을 섬기라는 부르심


1941년 11월, 미국 미네소타주 세인트폴시의 슬라브계 가톨릭 가정에서 박 신부는 태어났다. 보헤미아, 체코·슬로바키아, 크로아티아 등지에서 온 노동자들이 모여 살던 마을, 여느 슬라브계 이민자처럼 그의 가족도 겨우겨우 살아가는 서민이었다.


부모의 독실한 신앙은 박 신부의 성소의 밑거름이 됐다. 시간이 되는 대로 성가대 등 본당 활동에 깊이 참여하고, ‘온몸으로 기도하셨다’고 할 정도로 기도 생활이 열정적이던 아버지와 어머니를 보며 초등학생 박 신부는 “신부가 되고 싶다”고 얘기하기도 했다.


학창 시절에는 고등학교나 대학교에서 무언가를 가르치는 사람, 또는 학자를 꿈꿨다. 가장 좋아하는 과목은 화학이었다. 대학교에 들어갔을 때는 변호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정치학을 전공하려고 했다. 그런 그가 신부가 되는 결심을 하게 된 건 사제·수도자 부르심에 대한 가르멜회 신부의 특강을 듣고서였다.


“젊은 가톨릭 수도자로서 세계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정말 많다고, 그러니 수도자로서 세상으로 나아가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삶을 살라는 말씀이었어요.”


이렇듯 부르심은 박 신부가 그때까지 느껴본 적 없는 강한 끌림으로 찾아왔다. “사랑으로 사는 진정한 자유를 향한 이끌림”이라는 박 신부의 표현대로다. 때마침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대로 교회가 세상으로 나아가던 무렵, “교회처럼 나 또한 이 세상 사람들을 위해 살겠다”는 마음으로 박 신부는 수도 성소를 품었다.


“아마 너는 예수회원이 될 거야(Maybe you will be a Jesuit).”


어려운 선교지에 다녀온 한 교수 신부의 수업을 듣고 그를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는 등 식별의 과정도 거쳤다. “공부를 좋아하니 예수회 선교사가 돼라”는 신부와 어머니의 권유대로 박 신부는 대학교 1학년이던 1960년 8월, 선교 사명을 품고 예수회 위스콘신 관구에 입회했다.


■ 가난의 땅 한국을 섬기다


박 신부가 여러 선교지 중 특별히 한국을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관구 담당 선교 지역이 한국이었기에 파견지는 자연스럽게 한국이었다. 하지만 “수련기 때부터 한국에 가고 싶었다”고 표현할 만큼, 가난한 나라인 한국을 섬기려는 열망은 점점 커져만 갔다.


한국전쟁 여파로 인한 극심한 기아, 대통령 부정 선거 등 정치적 혼란…. 1960년대 미국에서 으레 한국에 대해 연상하는 이미지였다. 박 신부는 “그런 한국이기에 가고 싶다”면서 선교 파견을 자원했다. 당시 흑인 해방 운동을 펼치던 마틴 루터 킹 목사처럼, 그리스도의 삶을 보여주는 성직자로서 가난하고 탄압받는 인간을 해방하려는 열망이었다.


“인종차별로 고통받는 흑인들의 존엄함을 부르짖던 킹 목사의 이야기도 선교 사명에 불을 질렀죠. 수련원에서도 그분 글을 읽고 해방 운동에 대해 공부했어요.”


“갇힌 이들의 해방을 선포하고자 이 세상에 오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을 따라 우리도 사회로 나아가 정의를 요청해야 한다”는 킹 목사의 말처럼, 박 신부는 한국의 가난한 이들에게 그리스도를 선포하기 위한 9년간의 준비를 마치고 1969년 9월 입국했다.


“서울도 대부분 도로가 포장돼 있지 않았어요. 또 아주 작은 집과 밭들이 펼쳐져 있었죠.”


입국과 동시에 한국어를 배우면서 박 신부는 한국의 가난한 현실 또한 직접 배우게 됐다. 도로에는 군용차, 버스 외에 자가용도 거의 다니지 않았다. 길에는 무거운 지게를 지고 가는, 고된 노동으로 땀 흘리는 여위고 작은 사람들뿐이었다. 그가 생각하던 가난을 뛰어넘는 현장도 목격했다.


“홍제천 옆 하꼬방(판잣집)에 살며 더러운 물로 설거지하고 아무 살림살이도 없는 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보며 충격을 받았어요. 한국에도 그 정도로 가난한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가난 속 존엄함을 잃어버린 가난한 이웃…. 박 신부의 선교 사명은 개발 계획에서 소외된 이들이 스스로 해방할 수 있도록 돕겠다는 꿈으로 구체화했다. ‘동행’의 길이었다.



■ 동행의 길


1973년 사제 서품을 앞두고 신학대학을 다니던 박 신부가 마주한 가난은 인간과 사회 양쪽 차원의 가난이었다. 급격한 경제 성장이 이뤄진 1970~80년대, 외적으로는 점점 도시화했지만 도농 격차는 갈수록 커졌다. 새마을운동은 농촌 사회 붕괴를 가져왔다. 농촌에서 올라온 도시빈민들의 수입으로는 아이들의 고등 교육까지 수행할 수 없었다.


인간의 가난은 사회의 가난을 동반했다. 노동조합을 만들고자 노력하던 가톨릭노동청년회(JOC) 회원들이 갑자기 잡혀가고 고문을 당하고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박정희 대통령은 독재 집권을 위해 3선 개헌을 시도했고, 반대하는 야당과 언론을 탄압했다. 강제로 이뤄진 재개발과 철거는 기필코 폭력을 동원했고 많은 주민을 다치게 하고 주거권을 뺏었다.


불의라는 새로운 차원의 가난 앞에 변화를 외치고자 박 신부는 사회학을 전공할 것을 결심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신학생이 관심을 가지면 성소를 의심받던 분위기였지만, 사회 정의를 연구함으로써 가난한 이들과 동행하는 길을 걷고 싶었다. 그렇게 1974년 다시 미국으로 가 하와이주립대 대학원에서 사회학 박사과정을 거쳤다.



1979년 귀국해 서강대학교 사회학 교수로 소임하던 박 신부는 빈민 운동에 투신하게 됐다. 먼저 운동을 펼치던 예수회 고(故) 정일우 신부(John Vincent Daly·요한 사도·1935~2014)와 ‘빈민운동의 대부’ 고(故) 제정구(바오로·1944~1999) 의원의 영향이었다. “멀찍이 떨어진 연구에서 그치지 말고 터전으로 들어가야 하지 않겠느냐”는 권유였다.


“사회에 영향을 주고자 하는 사회학의 진짜 목적을 생각하면 연구자가 행위자로 움직여야 합니다.”


그렇게 박 신부는 1985년 제 의원의 초청으로 ‘천주교도시빈민회’에 가입하고 강제철거 현장에 참여하는 등 가난한 이들의 터전으로 뛰어들게 됐다. 연구자나 선교사로서 가르치거나 앞장서는 게 아니라 주민들과 관계를 맺고 이웃이 되었다. 이 모든 것은 그들이 스스로 권리를 되찾도록 조직화하기 위한 ‘동행’의 길이었다.


박주헌 기자 ogoya@catime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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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4-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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