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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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특집] 우리 생애 가장 아름다운 40일 II [5주차·끝]

유종의 미 거두려는 기자들 실천 더 치열해 지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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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이 다가오면서, ‘생애 가장 아름다운 40일’의 유종의 미를 거두고자 하는 기자들의 결심과 실천이 하루하루 더 치열해 지고 있다.

회식도 티타임도 마다하고, 또 아날로그식 전화 통화 방법에 적응해 가며 사순시기를 아름답게 마무리하고 싶은 절제의 시간들이 여물어 간다.



‘커피 끊기’ 이주연 기자

“커피 없는 날들, 오우, 생각만 해도 암울한데, 대단하십니다. 이러면서 또 생각나게 만드네요.”

“사순절이 벌써 절반 이상 지나갔잖아요. 부활절이 더 기쁘실 거예요.”

본의 아니게 얼굴까지 공개되며 나의 ‘커피 끊기’ 결심이 연재되고 있다 보니 취재처 지인들로부터 여러 인사와 격려를 받고 있는 요즘이다.

‘커피’ 때문인지 개인적으로는 예년에 비해 사순 시기가 너무 천천히 진행된다 싶은데, 달력 날짜들을 체크해 보니 부활절이 멀지 않았다.

사무실 주위를 둘러봤다. 술 끊은 결심이 흔들릴까 싶어 회식 자리도 마다하는 옆자리의 서 기자, 스마트폰을 접고 아날로그식 대화 수준에 머물러야 하는 답답함에 연신 머리를 긁적여 대는 앞자리의 조 기자. 뭔가 마음이 ‘짠’하고 안쓰럽다. 나 역시 여전히 매일 매일 심적으로 커피와의 전쟁을 벌이고 있지만 이처럼 평소 좋아했고 익숙했던 것들을 참아내며 함께 ‘아름다운 40일’에 도전중인 동료들 모습은 또 다시 마음을 다잡게 한다.

“그 쓸데없는 짓을 왜 하는 가.” “너 때문에 나까지 커피를 못 마시게 되니 짜증이다. 그냥 마셔라 마셔.”

한편에서는 아직 ‘악마의 유혹’으로 사뭇 결심을 흐려놓는 친구나 지인들도 자주 마주치는 현실. 하지만 구수한 커피향을 음미하고픈 갈증이 커져가는 만큼 이상하게도 한편에서는 뭔가 ‘목표’를 향해 한걸음씩 다가서고 있다는 나름의 성취감이 조금씩 생겨남을 느낀다.

처음 이번 기획을 시작할 때는 “한번쯤 커피를 마시게 된 실패담도 쓰게되지 않을까”라는 심정이 없지 않았으나 지금은 “정말 완주를 하고 싶다”는 깡다구가 만들어진 듯 하다.

그 완주의 의미는 부족하나마 절제의 덕을 쌓으며 가난한 이들을 돕는 계기를 ‘사순시기’와 함께 하자는 것일 게다.

지난주에서의 작심처럼 커피로 인한 절약금을 두배로 올려 돼지저금통을 불렸더니 제법 통통하게 배가 차오르고 있다. 또 다른 기쁨이다.

‘커피’에 민감해지면서 관련된 이야기들에도 눈길이 쏠린다. 세계적인 대문호 프랑스 소설가 발자크는 ‘문학의 나폴레옹’이 되고자 하는 열망으로 잠자는 시간도 아까워서 커피를 하루 40잔씩 들이켰다고 한다. 그가 평생마신 커피는 약 5만 잔. 결국 카페인 과다 복용으로 인한 심장질환을 앓게 됐고, 오랫동안 연모했던 백작부인과 결혼했으나 이후 5개월 만에 사망하고 만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 아닐 수 없다. 커피로 인해 새삼 깨닫는 금언(金言)이다.



‘금주’ 서상덕 기자

버틸 만큼 버텼다고 생각했는데…. 흑, 아직도 남았다. 인내도 인내려니와 술을 피할 수 있는 상황도 점점 아슬아슬한 임계점을 오르내리길 반복하고 있다.

웬만한 상황에서는 이런저런 사정 얘길 하거나 핑계를 대며 위기를 모면해왔는데 취재처에서의 첫 대면자리에서만큼은 빠져나갈 구멍을 찾기가 쉽지 않다. 그것도 첫 만남이라고 주교님이 술을 권하시는 데는…. 거기다 당신의 술잔을 직접 건네신다. 예전 같으면 ‘감사합니다’하고 냉큼 받았을 텐데. 어쩐단 말인가, 내 생애 유일무이한 도전이 될 터인데 술 한 잔에 공든 탑을 무너뜨릴 수도 없고.(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은 체험이니까.) 그간 다져진 내공을 발휘해야 할 때가 된 모양이다. 술을 입에 털어넣는 척 하곤 아무도 모르게 물잔에 도로 뱉어냈다.(참 별짓을 다한다. 주님, 저 이 정도면 괜찮은 인간이죠?) 공력을 이렇게 소진해선 안 되는데.

누구도 이해하기 힘들 뼈를 깎는(?) 고통의 시간을 보내며 조금은 여유로워진 자신을 발견할 땐 나도 놀랐다. 생각해보면 그도 그럴 것이 숙취 등 술로 인한 이차적 고통과 싸워야 할 시간이 사라진 만큼 자유가 덤으로 생긴 셈이다. 나의 고투가 전국적(?)으로 알려지면서 주위의 눈길이 바뀐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게 된 것도 달라진 점이라면 달라진 점이다.

“에이…, 정말 끊고 있는 거 맞아?” “정말 한 잔도 안 했어?” “그럴 리가 없는데…” 이런 유의 반응이 “야, 존경스럽다” “대단한데”라고 바뀌어가고 있을 무렵 나 자신도 어느 새 술 마시지 않는 술자리에 적응(?)해가고 있었다.

이젠 술자리마다 알아서 챙겨주는 이들이 하나둘 생겨서 ‘건배용’잔이 비면 각종 음료수나 물을 채워주곤 한다.(어쩌다 이 지경에….) 처음엔 따라주는 사람보다 내가 더 어색했다. 그런데 이젠 물잔(아니, 술잔)을 가지고 하는 팔운동이 자연스럽게까지 여겨진다. 이 얼마나 놀라운 변화인가. 더 놀라운 건 취기가 올라온 사람들의 기운이 내게도 전이되는지 나도 덩달아 취한 기분을 느낄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는 점이다.(이것이 혹시 주선(酒仙)의 경지?) 놀랍게도 상대의 취기에 맞춰 내 혀도 조금씩 꼬이는 느낌이 드는 게 아닌가. 이 정도면 거의 득도(?)의 수준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다양한 체험과 깨달음으로 이어지고 있는 나의 사순, 평생 두 번 다시 하지 못할 것이기에 그 어느 때보다 소중하게 다가온다.



‘스마트폰 끊기’ 조대형 기자



가톨릭신문  2013-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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