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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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해 · 창간 86주년 기획 - 현대 가톨릭 신학의 흐름] (3) 돌봄과 치유의 신학

‘주님 사랑·치유’ 이웃에 전달하는 것이 그리스도인 참 과제/ 병고 등으로 절망에 빠지는 삶/ 하느님 통해 참의미 깨달아야/ 복음서, 구원의 손길 ‘자비’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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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 전 캄보디아의 가톨릭교회에서 온 소년소녀들의 전통춤 공연을 관람한 적이 있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바로 ‘축복 춤’이었다. 그것은 휠체어에 탄 다섯 명의 장애우 어린이들 뒤에서 다섯 명의 정상 어린이들이 함께 춤을 추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뒤에 있는 어린이들이 휠체어를 끌고 당기고 이리저리 돌리며 춤을 추는 동안, 휠체어에 앉아 있는 장애우 어린이들은 작은 바구니를 들고 꽃잎들을 객석을 향해 뿌려대는 것이 아닌가?

나는 곁에 앉아 있던, 그들의 인솔자였던 캄보디아 현지 주교님의 설명을 들었다. 알고 보니, 이 춤에는 캄보디아 교회 특유의 신학적 해석이 담겨 있었다.

캄보디아는 오랜 내전 속에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 당한 비극의 땅이다. 그 ‘킬링 필드’에서의 참상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내전 기간 동안 설치된 수많은 대인지뢰들이 아직도 제거되지 않은 채 남아 있고, 그래서 아무것도 모르고 논밭에서 뛰어놀다가 팔다리가 잘려나간 어린이들 중 다섯 명이 지금 그 휠체어 위에 앉아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의 비참한 운명을 탓하거나 절망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런 비극적 전쟁의 희생자인 장애우들을 하느님께서 특별히 더 많이 사랑하시고 더 많은 자비를 베푸신다고 믿는다.

그렇게 자신들을 깊이 사랑해 주시는 하느님으로부터 충만한 축복을 받았기에, 넘쳐나는 축복을 자신들만 간직할 수 없어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자 하는 것이 바로 ‘축복 춤’의 의미였다.

그러므로 휠체어에 앉은 장애우 어린이들이 관객들을 향해 뿌리는 꽃잎들은 바로 하느님의 아름다운 축복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대신학교에서 그리스도론과 성령론을 강의하는 필자는 그 순간 바로 이것이야말로 살아있는 신학적 비전이고 희망이라고 생각했다.

우리의 삶은 어떤 의미에서 상실의 연속이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모두 그러하다. 노화의 상 실감과 절망감을 얼마나 피하고 싶기에, 오늘날 그렇게 많은 노화 방지 상품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가?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들이 노화나 병고 혹은 사고를 통한 우리 몸과 마음의 깨어짐과 상실, 그리고 그로 인한 절망으로부터 온전히 벗어나게 해줄 수는 없다. 우리는 오직 거룩하신 하느님과의 만남을 통해서만 깨어지고 부수어져버린 우리 삶의 진정한 의미를 되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복음서가 증언하는 것은 바로 이렇듯 고통 받고 절망하는 이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시는 예수님의 거룩한 손길이다.

“저녁이 되고 해가 지자, 사람들이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모두 예수님께 데려왔다. 온 고을 사람들이 문 앞에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마르 1,32-34).


 
▲ 다양한 연령대의 신자들이 모여 성체조배를 하고 있는 모습.
우리를 위해 피 흘리신 예수님의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을 체험하고,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성체조배의 참의미다.
 
 
필자는 몇 년 전 왼쪽 무릎 관절을 크게 다쳐 수술을 앞두고 있는 상태에서 이 구절을 묵상한 적이 있다. 등산을 유일한 취미로 하던 내가 이제는 무릎이 아파서 잘 걷지도 못하는 상태, 수술을 앞두고 마음이 매우 불안한 상태에서 읽었던 이 구절은 평상시에 읽던 것과는 전혀 다른 내적 역동성을 느끼게 해주었다.

예수님 앞에 모여든 수많은 아픈 사람들의 상실감과 절망감, 고통 받는 그들의 간절한 바람과 소망, 그리고 이들을 바라보며 모든 것을 아시는 예수님의 자비로운 눈길, 마침내 이들을 돌보아 치유해 주시는 예수님의 기적….

나 역시 거기에 함께 있고 싶었다. 예수님의 손길이 와 닿기를 기다리며 그 자리에 모여 있는 수많은 아픈 사람들 속에 함께 서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정녕 내 몸이 직접 아파봐야 비로소 다른 사람들의 아픔과 고통을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인가? 정녕 내 몸이 정말 아파봐야 비로소 주님의 자비를 바라는 절박하고도 간절한 마음이 생기게 되는 것인가?

예수님께 치유받는 사람들은 몸만 고치는 것이 아니라 마음까지도 치유 받게 된다. 예수님의 치유 기적 사화는 그저 물리적 차원에서만 이루어지는 자동적, 기계적인 치료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전 존재를 치유하고 새롭게 하는 하느님의 권능이 이 땅 위에 실현되고 이루어짐을 뜻한다.

신학적으로 말해서, 이러한 기적 사화들은 바로 예수님과 함께 도래한 ‘하느님 나라’의 현존을 드러내는 표징이다.

그런데 ‘하느님의 나라’란 공간적이고 지역적인 개념으로 파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다스림’ 혹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짐’을 의미한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기도’에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진정한 기적의 핵심은 물리적 현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의 뜻이 내게 이루어지는 데에 있다.

결국 예수님의 돌봄과 치유는 육체만을 낫게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진정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뜻이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져 한 인간의 전인적 차원을 관통하게 된다는 점이다.

이는 인간의 영혼과 육신을 분리시키고자 하는 영육이원론을 극복한 차원에서의 전인적 치유 개념이다. 인간의 영혼과 육신을 구분할 수는 있지만, 성경은 통합적 인간을 말한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던 시대에는 병을 곧 죄의 결과라고 간주하였다.

그렇다면 지금 몸이 아픈 사람들은 모두 큰 죄를 지어 벌을 받고 있다는 말인가? 물론 그런 뜻은 아니다. 내 윤리적 죄와 병은 필연적인 인과관계를 맺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병고를 단지 육체적 차원에만 국한시켜 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실, ‘죄’라는 게 무엇인가? 악한 결과를 자아내는 매우 탐욕스러운 죄악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인간의 부족함과 나약함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죄가 생겨나기도 한다.

고해성사에서 “사는 게 다 죄지요!”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가끔 있다. 그렇다. 우리의 삶은 너무도 많은 부족함과 한계 속에 시련과 고통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의 ‘죄’란 법적이고 윤리적 차원에서의 능동적 죄악 개념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 서 있는 한 인간의 부족함과 나약함, 즉 좌절할 수밖에 없는 그 필연적 한계를 드러내는 말이다. 이 죄 많은 한계적 인간에게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져 그분의 권능이 내 온 존재를 관통하여 나를 다시 일으키시는 것이 바로 기적의 참다운 의미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카파르나움의 어느 집에 계실 때, 군중이 너무 많아 들어올 수 없게 되자



가톨릭신문  2013-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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