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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해 · 창간 86주년 기획 - 현대 가톨릭 신학의 흐름] (12) 하느님께 부르심 받는 데에 응답하는 ‘영성생활’

올바른 영성생활, 정통 교리 기반으로 출발/ 실천 방법에만 막연히 관심 갖지 말고, 학문으로서의 영성신학 탐구자세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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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사이 교회 안팎을 불문하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관심을 많이 갖는 단어 중에 하나는 ‘영성’(靈性)일 것이다.

한국사회에는 종교도 다양하고 숫자도 많을 뿐만 아니라, 심리학의 발달로 인간 내면에 대한 연구 결과를 실생활에 적용하고자 하는 시도가 늘어나면서 인간의 내적인 생활을 가늠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영성생활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전문가의 견해로는 한국사회에서 관심을 갖고 있는 영성이 가톨릭교회에서 전통적으로 실천하는 올바른 영성과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하기에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인다.

그런데 한국 가톨릭교회 신앙인들의 종교의식을 살펴보면 전통적인 올바른 영성생활을 실천하기 어려운 환경이라는 것을 엿볼 수 있다.

2004년 한국갤럽의 조사에 따르면, 불교와 개신교 및 가톨릭 중에서 종교를 믿는 이유가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함이라는 대답이 가톨릭교회 신앙인에게서 가장 높게 나왔으며 그 비율은 80에 육박하였다.

반대로, 가톨릭교회 신앙인 사이에서 종교를 믿어야 하는 진정한 이유인 내세에 구원을 받아 영원한 삶을 누리고자 하는 대답은 개신교 신앙인의 대답 비율인 약 23에 훨씬 못 미치는 약 6정도였다. 처음부터 내세에서 구원을 받고자 하는 마음이 아니라 현세에서 마음의 평안을 누리고자 하는 자세로 종교에 임하였다면 그런 신앙인이 추구하는 영성생활은 분명히 가톨릭교회의 전통적인 올바른 영성생활과 차이가 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마음의 평안을 추구하면 올바른 영성생활을 실천할 수 없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최후만찬 석상에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 14,27)라고 가르치셨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관점과 하늘나라의 관점은 다르다는 것을 가르치고 싶으셨을 것이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관점에 따른 평화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34 참조. 루카 12,51)

그동안 그리스도교가 교리를 통하여 현세에서 복을 얻고자 하는 신앙관은 올바른 것이 아니라고 강조하였기 때문에, 통계 자료에서도 현세구복이 종교를 갖는 이유라고 대답한 가톨릭 신앙인의 비율은 약 8 정도에 불과했다.

그런데 마음의 평안을 추구하는 신앙인들의 내면에 현세에서 심리적인 안정감을 누리고자 하는 이유를 포함하여 현세와 관련된 행복을 찾는 심정을 마음의 평안을 추구하는 것 안에 우회적으로 담아 표현하였을 수 있다는 것이다.

가톨릭계 출판사에서 출판한 서적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서점을 방문해 보면 영성과 관련된 서적 코너가 항상 마련되어 있다. 그리고 그곳에 진열된 서적은 성경, 신학, 전례, 교리 등의 코너보다 훨씬 많은 서적이 꽂혀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영성 관련 서적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에세이나 묵상집과 같은 서적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읽기 쉽고 감동을 주는 서적도 그리스도인의 영성생활에 커다란 도움을 줄 수 있겠지만, 올바른 영성생활이 무엇인지를 잘 안내해 주는 지침서들을 통해 영성생활의 기초를 튼튼하게 다지지 않을 경우에는 감동을 주는 서적을 통해 심리적인 안정감만을 추구하고 말 수도 있다는 것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에게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들려주라 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나는 주 너희 하느님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자신을 거룩하게 하여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1,44 참조. 레위 11,45 19,2 20,26)

예수님께서도 산에 오르시어 제자들과 군중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이와 같이 하느님을 믿는 모든 신앙인들은 성성(聖性)에로의 보편적 부르심을 받고 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께서 거룩하신 것과 같이 우리도 거룩하게 되어야 하고, 하느님께서 완전하신 것과 같이 우리도 완전하게 되어야 한다는 성소(聖召)를 하느님께 받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영성생활의 출발점이자 전부이다.

즉, 그리스도인의 영성생활은 내적인 심리적 안정감을 통한 마음의 평안함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자신과의 처절한 싸움을 통하여 악의 유혹에 걸려 넘어지지 않고 더 성스러워지도록 완덕의 완성을 향하여 하루하루 발전하는 여정을 걸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 그리스도인의 영성생활은 심리적 안정감을 통해 마음의 평안함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의 처절한 싸움을 통하여 완덕의 완성을 향하여 하루하루 발전하는 여정을 걸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사도 바오로도 필리피 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나는 내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내달리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하늘로 부르시어 주시는 상을 얻으려고, 그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필리 3,13~14)

즉, 바오로는 그리스도 때문에 세상의 가치를 해롭다고 여기고 주님께서 마련하신 의로움을 향해 온힘을 다하여 달려간다고 고백하였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영적 여정이 그리스도를 믿으며 그리스도 때문에 출발하게 된 것이고, 도착해야 하는 곳도 그리스도의 부활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영성생활을 실천하는 중간 과정이 비슷하다고 해서 우리가 실천하는 모든 영성생활이 다 그리스도교의 올바른 영성생활이라고 말할 수 없으며, 분명하게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구세주 그리스도를 올바로 인식하고 믿는 데서부터 출발하여 내세의 하느님 나라를 도착지 목표로 하여야 올바른 영성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학문으로서의 영성신학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아무리 영성생활이 각자 개개인이 실천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공통되는 체험도 없고 나아가야 할 방향도 제각각이라면 어떻게 실천하는 것이 올바른 영성생활인지 가늠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톨릭교회는 이천년 역사 안에서 영성생활을 객관적으로 살펴보고 평가할 수 있도록 학문적 체계를 세우고자 노력하였다.

20세기 영성신학자 베르나르는 영성신학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영성신학은 계시 원리에 입각하여 그리스도인의 영적 체험을 연구하고 그 점진적 발전을 기술하며 그 체험의 구조와 법칙들을 파악하고자 하는 신학의 한 분과이다.”

먼저 하느님의 계시에



가톨릭신문  2013-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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