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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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해 · 창간 86주년 기획 - 현대 가톨릭 신학의 흐름] (13) 은총으로 하느님과 합일 체험하는 ‘신비생활’

신비체험, 완덕을 향한 매진에 보여주시는 은총의 시간/ 이천년 교회 역사 안에서 다양한 형태로 드러남/ 능동적 노력·수동적 은총 속에서 이끌리게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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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그리스도인이라면 지상에서의 영적 여정 안에서 한 번쯤은 하느님을 만나 뵙고 싶은 바람을 가졌을 것이다. 그리고 이 바람은 사실 우리 신앙의 궁극 목적이 하느님께 구원의 은총을 받아 내세에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생각해 볼 수 있는 희망사항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께로부터 우리 자신이 거룩해지라고 불림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느님을 뵙기 위해서는 죄 많은 상태에 머물면서 하느님께 나아갈 수 없고 하느님을 만나뵐 수 있는 합당할 준비를 하는 정화의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호렙산에서 불에 타도 타서 없어지지 않는 떨기나무를 자세히 보러가던 모세에게 주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이리 가까이 오지 마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탈출 3,5)

신을 벗는 동작은 우리가 하느님을 뵐 수 있는 합당한 상태가 되도록 정화를 통한 준비를 하는 행동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우리는 하느님을 만나기에 아직까지 충분한 자격을 갖추지 않았지만, 최소한의 정화 과정을 통해 하느님을 만나뵐 수 있는 은총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거룩함에로 불렸다는 것은 하느님을 뵈러 갈 수 있도록 합당한 준비를 시작하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거룩해지기 위해 걷는 우리의 영적 여정은 이 지상에서 거의 대부분 완성을 이루지 못한다.

그저 우리는 나날이 완덕을 향하여 발전의 단계를 걸어가는 것뿐이다. 그리고 자신이 달성한 성덕의 단계를 가지고 내세에 하느님 대전에서 심판받는 것이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지상에서 완덕을 완성하고자 열심히 노력하는 신앙인의 공로를 보시고 때때로 은총을 베푸시어 아직 지상의 삶이 다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잠시나마 우리의 영혼이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는 순간을 허락하기도 하신다.

우리는 이 은총의 시간을 신비체험이라고 부른다. 물론 이 은총의 시간이 모든 신앙인에게 허락되는 것은 아니지만, 하느님을 만나뵙기를 염원하는 그리스도인은 이 신비생활을 갈망하며 열심히 영성생활을 실천한다.


 
▲ 양떼를 몰던 모세가 불에 타도 타서 없어지지 않는 떨기나무를 보고 다가가다가 하느님 음성을 들은 호렙산(시나이산) 전경.
 

 
이천년 교회 역사를 살펴보면 다양한 형태를 통해 하느님과 합일의 신비체험을 하는 경우를 확인할 수 있다.

사도 베드로는 야포시에 있는 무두장이 시몬의 집 옥상에서 기도를 하던 중에 무아경 속에서 환시를 체험하며 하느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 결국 하느님의 뜻을 헤아려 카이사리아에 있는 이탈리아 부대 백인대장 코르넬리우스와 그의 가족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참조-사도 10장).

사도 바오로도 어느 날 몸째 그리 되었는지 몸을 떠나 그리 되었는지 알 길이 없지만 셋째 하늘까지 들어 올려져 엄청난 계시를 받은 일이 있었다고 고백하였다(참조-2코린 12,1~7).

결국 그들은 기도 속에서 하느님의 은총이 더욱 작용하여 수동적으로 신비체험을 하게 되었다.

한편 고대 그리스도교 신학자를 대표하는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저서 「고백록」에서 항구 도시 오스티아에서 어머니 모니카와 함께 겪은 신비체험의 분위기를 전해주면서 동시에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강렬한 사랑이 계단을 밟아 오르듯 우리를 창조주 하느님께로 인도하리라고 언급하였다.

중세 수도자를 대표하는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 성인은 저서 「아가서 강론」에서 인간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정도가 발전하여 오로지 하느님만을 바라며 사랑하는 단계에 오를 때, 주님의 입술에 입맞춤하며 하느님과 합일의 체험을 할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결국 인간이 애덕을 완성하고자 최선을 다할 때 은총으로 신비체험의 순간이 허락되어 질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근세 신비체험가를 대표하는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는 수도원 생활 중에 신비스러운 환시와 음성을 체험한 후 저서 「영혼의 성」에서 기도를 실천하는 가운데 자신의 내면 영역을 세심하게 성찰하여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 계시는 하느님과의 합일 체험을 단계별로 상세하게 설명하였다.

동시기에 십자가의 요한 성인도 톨레도 수도원 다락방에서 신비스러운 체험을 한 후 저서 「카르멜의 산길」과 「어둔 밤」에서 외적 감각과 내적 감각을 잘 정화하면 하느님과 합일하는 체험을 할 수 있다고 소개하였다.

결국 능동적인 노력과 수동적인 은총의 작용이 어우러질 때 신비체험에로 이끌리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17세기에 들어서서 ‘오직 은총만으로’ 구원받고 하늘나라에 갈 수 있다는 종교개혁가들의 주장에 휩쓸려 능동적인 노력은 도외시한 채 하느님의 은총에만 의지하면서도 전혀 다른 두 방향으로 전개된 이단적인 신비체험이 출현하였다.

먼저 은총을 강조하였던 교의적 얀센주의는 일부 종교개혁가들의 극단적인 주장이었던 예정설과 맞물리면서 윤리적 얀센주의를 탄생시켰다.

윤리적 얀센주의자들은 인간이 구원되기 위해서는 은총뿐만 아니라, 먼저 구원명부에 이름이 올라 있어야 하는데, 그 사실을 알 수 없는 지상의 인간이 넋을 놓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하느님 앞에서 극단적인 고신극기를 실천한다면 하느님께서 측은지심이 들어 후에라도 구원해 주실 수 있다고 생각하고 엄격한 고행을 실천하였다.

한편 정적주의자들은 하느님께서 은총을 베푸시고 인간 영혼을 성령이 이끌어 주셔야만 신비체험도 할 수 있고 궁극적인 구원도 받을 수 있다고 여기면서, 마음의 동요를 일으켜 은총의 작용을 느끼는 것을 방해받지 않기 위하여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고 행하지도 않으면서 고요한 상태만을 유지하려 노력하였다.

은총에만 의지하려고 하였던 그들은 급기야 고해성사와 성체성사까지 거부하는 사태까지 만들었다.

결국 가톨릭교회는 얀센주의와 정적주의를 이단으



가톨릭신문  2013-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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