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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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해 · 창간 86주년 기획 - 현대 가톨릭 신학의 흐름] (14) 완덕 완성 위해 노력하는 영적 여정으로서의 수덕생활

악행 끊고 덕행 습득 실천 … 수덕생활 두 바퀴/ 동방교회 사막 은수자 출현으로 본격 관심/ 중세 수도자 고신극기 미덕 여기는 폐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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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느님과의 합일을 갈망하며 이어지는 그리스도인의 영성생활은 신비생활과 수덕생활의 분명한 구분이 없이 함께 조화를 이루면서 실천되어 졌다.
 

그리스도인의 영성생활은 성경시대에서부터 성령의 활동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자체가 성령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승천하시기 직전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물로만 베푸는 요한의 세례를 대신하여 성령의 세례를 받을 것이라고 예고하셨다(참조. 사도 1,5).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교회 신자들에게 아폴로가 요한의 세례를 베푼 것을 알고 성령의 세례를 다시 베풀었다(참조-사도 19,1~6). 사도 베드로는 이방인 코르넬리우스 가족들에게 성령께서 내려오시는 것을 보고 지체없이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참조-사도 10,44~48).

성령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은 즉시 거룩함에로 불리게 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최종 목적지인 하느님과의 합일을 갈망하며 신비생활을 추구해 나아간다.

물론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은총과 성령의 이끄심으로 종착지인 하느님 대전에 도착할 수 있지만, 완덕의 완성을 이루기 위한 발전적인 영적 여정을 걷게 된다. 그리고 이 영적 여정을 걷는 동안 그리스도인은 덕행을 수련하여 성성(聖性)에 도달하는 수덕생활을 살게 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영성생활은 신비생활과 수덕생활의 분명한 구분없이 함께 조화를 이루며 실천되어 졌다.

하지만 수덕생활에도 고유한 전개 방식이 있다. ‘수덕’이란 단어의 어원을 살펴보면 운동선수들이 줄기차게 노력하고 반복해서 훈련을 하여 자신의 운동 종목을 능숙하게 익힌다는 뜻을 지닌다. 그리고 초대 교회는 이 의미를 영적 여정에 접목하여 종교적인 의미를 지닌 단어로 탄생시켰다.

사실 사도 바오로도 영적 여정을 걸어가야 하는 그리스도인을, 달릴 길을 최선을 다해 달음질하는 모습으로 묘사하곤 하였다(참조-1코린 9,24 필리 3,12~14 2티모 4,7).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수덕생활 안에서 완덕의 완성을 방해하는 모든 요소들과 투쟁하며 자신을 억제하고 포기할 뿐만 아니라, 아직 성취하지 못한 완덕의 완성을 위하여 인간적으로 가능한 모든 노력을 지속적으로 기울이게 된다.

초대 교회에서부터 수덕생활은 악행을 끊는 노력과 덕행을 습득하는 두 가지 방향으로 실천되었다.

사도 바오로는 갈라티아교회 신자들에게 육의 행실인 ‘불륜, 더러움, 방탕, 우상 숭배, 마술, 적개심, 분쟁, 시기, 격분, 이기심, 분열, 분파, 질투, 만취, 흥청대는 술판, 그 밖에 이와 비슷한 것들’과 같은 악행 목록과 성령의 열매인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와 같은 덕행 목록을 제시하였다(참조-갈라 5,19~23). 그리고 사도 바오로는 육정과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고 성령을 따라 살아가자고 권고하였다.

또한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수덕생활을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고 따르는 삶으로 이해하였던 그리스도인은 특히 로마제국의 박해시대에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범적인 수덕생활로 순교의 삶을 생각하였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수덕생활을 통해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치르면서 이 세상으로부터 해방되고자 하였다.

이런 맥락 아래에서 그리스도인이 전통적인 수덕생활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고 실천하기 시작한 것은 동방교회에서 사막 은수자들의 출현과 관련이 있다. 사막의 은수자들은 관상기도를 통하여 하느님과의 합일을 염원하면서 완덕에 방해되는 요소를 살펴 피하고자 하였고 도움이 되는 덕행을 찾아 실천하고자 하였다.

이집트 사막에서 수도생활을 실천했던 폰투스의 에바그리우스는 수도자가 기도에 집중하는 것을 방해하는 잡념으로 ‘폭식, 간음, 탐욕, 슬픔, 분노, 나태, 허영, 교만’과 같은 악행 목록을 언급하였으며, 이러한 나쁜 생각을 극복할 수 있는 덕행으로 ‘무정념(無情念)’을 강조하였다. 이후 수도자들은 이와 유사한 목록들을 마련하여 완덕을 완성하는 수덕생활의 방편으로 실천하였다.

한편 서방 가톨릭교회로 옮겨온 수도생활은 중세에 들어서서 더욱 발전하면서 하느님과 합일의 신비생활을 위하여 자신과 악덕을 끊는 극기의 삶을 수행하면서 성덕을 쌓는 수덕생활을 더욱 열심히 실천하였다. 다만 일부 수도자들이 과도하게 고행을 실천하면서 편태 등의 고신극기를 마치 하나의 미덕처럼 여기는 감상적인 측면이 극대화되는 폐단도 발생하였다.

근세에 들어 인문주의의 출현으로 수덕생활에서 과도한 고신극기의 분위기는 한풀 꺾였지만, 중세 말엽에 이르러 지나치게 학문적으로 이론화된 신비생활에 반발하여 영성훈련이라는 새로운 신심운동 방법이 출현하면서 그리스도인은 여전히 수덕생활을 실천하였다.

이런 가운데 영성생활 안에서 그리스도인은 신비생활의 경우에는 쉽게 접할 수 없으므로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면서도, 수덕생활의 경우에는 열심히 노력만 하면 그 실체를 보다 쉽게 느끼고 삶으로 보일 수 있었기 때문에 수덕생활에 매진하는 경향을 보였다. 얀센주의가 가톨릭교회 안에서 오랫동안 영향을 끼칠 수 있었던 것도 그리스도인에게 지지를 받는 수덕생활을 기반으로 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17세기 가톨릭교회에서 얀센주의와 정적주의라는 이단적인 영성생활이 나타나기 전까지 그리스도인은 신비생활과 수덕생활을 따로 구분하지 않고 함께 어우러져 있는 가운데 영성생활을 만들어 실천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이단적인 영성생활의 출현을 통하여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인은 신비생활을 공개적으로 언급하기에 부담을 느끼게 되었고, 그 결과로 신비생활은 영성생활의 수면 아래로 가라앉게 되었으며 수덕생활만 홀로 실천되었다.

더 나아가서 교회에서는 수덕생활을 가지고 이단적인 영성생활의 피해를 극복하려고까지 시도하였다.

대표적으로 18세기에 윤리신학자이면서 영성신학자이었던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성인은 이단주의자들이 성사생활에서 오는 은총의 힘을 믿지 않고 성사생활을 거부하였던 모습에서 착안하여 성사생활을 중심으로 하는 수덕생활을 열심히 실천할 것을 권고하였다.

특히 그리스도인은 성체성사를 통하여 구원의 은총에 더욱 다가갈 수 있으므로 자주 미사에 참여하여 매번 성체를 영할 것을 강조하였을 뿐만 아니라, 성체조배와 성체강복 등 성체와 관련된 신심생활을 실천하면서 이단적인 영성생활의 나쁜 영향을 없애려고 노력하였다.

결국 18~19세기에 영성가와 신학자는 신비생활과 신비신학을 더 이상 언급하지 않고, 오히려 수덕생활과 수덕신학을 조명하고 강조하였다. 그 결과로 오늘날 우리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각종 신심 행위들이 이 시기에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게 되었다. 즉,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완덕을 추구하며, 일시적으로라도 주님의 은총을 얻고, 구원을 위하여 초자연적인 질서에 참여하고자 대중적인 다양한 신심 행위들을 실천하게 되었다.

먼저 그리스



가톨릭신문  2013-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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