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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 위해 기꺼이 목숨 바친 ''조선인 첫 사제''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 김대건 신부의 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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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일은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이다(원래는 5일이지만, 주일인 7일로 옮겨 지낸다). 김대건 신부는 단순히 한국인으로서 첫 번째로 사제품을 받았기 때문에 한국 성직자의 수호자로 공경받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의 전 생애는 하느님과 긴밀한 일치를 이루는 삶이었다. 그는 하느님의 섭리와 자비에 대한 특별한 신뢰심을 갖고 있었고 교회에 순명했다. 또 짧은 사제 생활이었지만 신자들을 지극히 사랑했던 훌륭한 목자였다. 아울러 순교는 갑작스러운 사건이 아니라 많은 기도와 준비를 통해 이뤄진 그의 영적 삶의 결실이었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성인을 한국 성직자들의 모범이자 수호자로 공경하는 것이다. 김대건 성인 대축일을 맞아 성인의 생애를 크게 4단계로 구분해 간략히 살펴본다.  
 

 
▲ 솔뫼성지에 복원된 성 김대건 신부 생가.
성인의 집안은 이곳에서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였고 10명의 순교자를 배출했다.
 
 
 ▨순교자 가문에서 태어난 준비된 성인

 성인은 1821년 8월 21일 충청도 솔뫼(현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에서 성 김제준(이냐시오)과 고 우르술라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명은 `재복`(再福), 자는 `신명`(信明)이었다.

 김대건 신부 가문에서 처음으로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인 이는 증조부 김운조(비오)였다. 이후 이 가문에서 순교자 10명이 나왔다. 박해와 증조부의 순교로 김대건 일가는 1827년 고향을 떠나 서울 청파를 거쳐 경기도 용인 한덕동으로, 다시 교우촌인 골배마실(현 경기도 용인시 내사면)로 이주해 정착했다. 김대건은 1836년 4월 골배마실 인근 은이공소에서 모방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신학생 후보로 선발됐다. 이처럼 김대건은 순교자 집안에 태어나 교우촌 지도자로 활동한 아버지와 어머니의 신앙과 믿음 속에 양육돼 비록 열다섯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사제 성소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결단을 내려 천주의 부르심에 나설 수 있었다.


 ▨신학생 시절

 김대건은 최양업(토마스)ㆍ최방제(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함께 1836년 12월 3일 성 정하상(바오로)의 인도로 한양을 떠나 변문으로 출발, 국경을 넘고 중국 대륙을 남하해 1837년 6월 7일 마카오에 도착,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 신학교에 입학했다. 김대건은 그해 11월 열병으로 동료 최방제를 잃는 슬픔을 겪었다.

 박해를 피해 숨어 살아야 했기에 김대건은 어린 시절부터 발육 상태가 좋지 않았다. 키는 컸지만, 영양 부족에서 오는 여러 요인 때문에 가슴앓이, 위장병, 요통, 두통 등으로 청년이 돼서도 고생했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신체적 결함을 자신에게 맡겨진 민족 복음화에 대한 정열과 신앙에 바탕을 둔 조국애로 극복해 나갔다. 조선 신학생들의 스승이었던 르그레즈와 신부는 "조선 소년들은 훌륭한 사제에게 바람직스러운 것, 신심, 겸손, 면학심, 스승에 대한 존경 등 모든 면에서 완벽하다"고 대견해했다.


 
▲ 김대건 신부가 상하이에서 사제품을 받고 제주도를 거쳐 귀착한 나바위성지.
 
 
 ▨조선 입국로 개척과 사제수품

 신학생 김대건은 서양 선교사의 안전한 입국을 위해 조선 입국로 개척에 힘썼다. 1842년 2월 15일 마카오를 떠나 1차 조선 입국로 탐색 여행에 나선 김대건은 이후 4년 6개월여의 긴 기간 동안 순명과 신앙의 힘으로 갖은 역경을 극복하면서 이 일에 헌신했다. 김대건은 이 기간에 5차례 탐색 여행을 시도했고, 3차례 입국했다.

 1845년 1월 15일 서울에 도착한 김대건 부제는 돌우물골(현 서울 소공동 조선호텔 일대)에 선교사들이 거처할 집을 마련하고, 14세 남자아이 2명을 신학생으로 선발해 가르쳤으며, 「조선전도」를 작성해 마카오로 보냈다. 또 현석문(가롤로) 등이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조선순교사와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김대건은 최양업과 함께 1844년 12월 10일경 중국 땅 소팔가자에서 페레올 주교에게서 삭발례부터 부제품까지 받았다. 김대건은 7개월 후 1845년 8월 17일 상하이 진쟈샹(金家港)성당에서 페레올 주교에게서 사제품을 받고 8월 24일 헝탕(橫塘)성당에서 첫 미사를 봉헌했다.

 순교자의 피로 물든 혹독한 박해 중에도 한마음으로 기도했던 조선 신자들의 염원 `조선인 첫 사제`가 드디어 탄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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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3-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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