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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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해 · 창간 86주년 기획 - 현대 가톨릭 신학의 흐름] (15) 수덕신학과 신비신학의 정착 과정

신앙 안의 올바른 실천 위해 학문적 영성신학 출현 / 18C 이르러 학문의 독립 체계 갖추는 노력 시작/ 1920년대 이후 영성신학자들 본격적으로 나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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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우리가 쉽게 사용하고 있는 ‘영성(spirituality)’이라는 단어가 교회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고작 1960년대에 이르러서였다.

물론 이 단어의 어원이라 할 수 있는 라틴어 명사 ‘spiritualitas(영성)’가 이미 5~6세기에 사용되었던 증거가 있지만, 학문세계에서 이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였다. 즉, 프랑스어권에서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개인적인 관계를 표현하기 위하여 ‘spiritualité(영성)’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이 계기가 되었으며 18세기에 프랑스 백과사전학파를 통해 서서히 확산되었다.

그런데 영성이라는 단어가 사람들 사이에서 부각되기 이전부터 뿐만 아니라 최근에 이르기까지 영성생활을 지칭하기 위하여 수덕생활, 신비생활, 내적 생활, 신심생활, 완덕의 삶 등 다양한 표현이 사용되었다.

하지만 현대로 오면서 영성은 삶을 살아가는 분야에서만 성찰되어져야 할 것이 아니라, 이론적인 근거와 체계를 갖춘 학문 분야에서도 성찰되어져야 할 필요가 더욱 고조되었다. 즉 신학자들은 학문으로서의 영성신학, 신학으로서의 영성신학을 고찰하면서 독립된 학문 분야로 만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5세기 말경 위(僞)디오니시우스 저서의 제목으로 ‘신비신학’이 사용되면서 교회에 이와 같은 표현과 학문적인 관점이 알려지긴 했으나, 그 이후 본격적인 논의로까지 확대되지는 못하였다.

중세 중기 유럽에 대학들이 설립되면서 세상 학문이 체계를 잡기 시작하였고, 비슷한 시기에 교회에서는 스콜라신학이 출현하여 하느님을 탐구하는 신학도 세상 학문과 견줄 수 있는 이론과 체계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중세 말기 교회는 교의신학과 윤리신학을 아우르는 조직신학의 틀을 갖출 수 있었다. 하지만 영성신학은 근세 초기까지 조직신학에 포함되어 독립적인 신학분야로 발전하지 못하다가 18세기에 이르러서야 서서히 독립된 체계를 갖추려는 의미있는 노력이 시도되었다. 결국 이렇게 학문으로서의 영성신학이 출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영성생활이 이단으로 빠지지 않고 가톨릭 신앙 안에서 올바로 실천되어지는 방향을 제시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18세기 예수회 수도자였던 이탈리아 출신 스카라멜리(Giovanni Battista Scaramelli, 1687~1752)는 오늘날 통용되는 영성신학의 개념이 자리 잡을 수 있도록 기여하였다. 스카라멜리는 「수덕적 지침」과 「신비적 지침」이라는 두 작품을 통해서 영성생활 안에 수덕적인 측면과 신비적인 측면이 별개로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대부분 그리스도인은 수덕생활을 통해 능동적으로 완덕의 완성을 이루게 되는 반면에, 극히 소수의 그리스도인은 신비생활에 불림받아 비상한 은총을 통하여 수동적으로 하느님과의 합일에 이른다는 것이다. 결국 스카라멜리는 수덕신학과 신비신학을 분명하게 구분하였다. 이는 17세기 이후 그리스도인의 관심 밖으로 밀려났던 신비생활을 다시 관심 안으로 불러오는 효과를 가져왔다.

19세기에 역시 예수회 수도자이었던 프랑스 출신 풀랭(Auguste-François Poulain, 1836~1919)은 한동안 소외되었던 신비신학을 다시 강조하였다. 풀랭은 「기도의 은총들」이라는 저서를 통해 신비생활에 관심 있는 그리스도인과 영적 지도자에게 도움을 주기 위한 학문적이고 신학적인 체계를 제시하였다.

즉, 풀랭은 그리스도인이 능동적으로 실천하는 관상생활과 하느님의 은총을 통해 수동적으로 주어지는 관상생활을 구별하여 언급하면서 하느님과의 합일의 신비생활을 분석적이며 서술적으로 설명하였다.

물론 일부 신학자들이 풀랭의 주장이 신학적 체계를 충분히 갖추지 못하였다고 비평했지만, 다른 많은 신학자들은 그의 신비신학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심화하여 발전시키기도 하였다.

결국, 신비신학에 대한 논쟁은 이웃 나라로 계속 번져나갔다. 비슷한 시기에 도미니코회 수도자였던 스페인 출신 아린테로(Juan González Arintero, 1860~1928)는 신비신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그 연구에 여생을 바쳤다. 아린테로는 「신비생활의 발전」이라는 저서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이 애덕의 완성에로 불림 받았으므로 영성생활 안에서 모두에게 신비체험이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아린테로의 신비신학은 몇몇 비판에도 불구하고 여러 신학자들에 의해 전반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 1919년 교황 베네딕토 15세가 수덕신학과 신비신학에 대한 강좌를 개설할 것을 권고한 로마 소재 교황청설립 그레고리오대학교 전경.
 

이렇게 20세기에 들어설 때까지 신비신학에 대한 논의가 개별 신학자들에 의해서만 이루어지자, 수수방관할 수 없었던 보편교회는 급기야 중요한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1919년 교황 베네딕토 15세는 로마 소재 교황청설립 그레고리오대학교에 서한을 보내어 수덕신학과 신비신학에 대한 강좌를 개설할 것을 권고하였다. 교황의 생각에 따르면, 성직자 양성에 있어서 영성생활에 대한 올바른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자질이 부족한 상태로 양성된 성직자가 수덕생활과 신비생활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여 그리스도인의 영혼에 커다란 해를 끼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로 그레고리오대학교는 수덕신학과 신비신학 강좌를 개설하였지만, 로마 내 다른 신학대학들이나 유럽 전역의 신학대학들은 여전히 수덕과 신비신학을 선뜻 가르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많은 신학자들이 아직까지 수덕·신비신학은 교의신학과 윤리신학의 범주에 포함된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931년 교황 비오 11세도 사도 헌장 ‘주님은 지식의 하느님’에서 신학 분야 안에서 수덕신학은 보조학문으로, 신비신학은 특별학문으로 분류할 수 있다고 언급하였다.

결국 1920년대 이후부터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전까지 가톨릭교회 내에 영성생활을 사색하여 이론화하는 영성신학자들이 본격적으로 출현하게 되었다. 그들은 영성신학을 탐구할 수 있는 방법론적인 기초를 다졌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에게 영성신학을 잘 알리고자 영성신학 전문 잡지들을 정기적으로 출간하였고 교과서적인 구성을 가진 영성신학 서적들도 집필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저서들은 교회 안에서 오랫동안 읽혀졌다.

먼저, 쉴피스회 소속 사제였던 프랑스 출신 탕케레(Adolphe Alfred Tanquerey, 1854~1932)는 쉴피스회 수련장으로서 수련자들의 교육을 담당하여 후진 양성에 힘쓰던 중 1923~24년에 「수덕 및 신비신학 요약서」를 편찬하였다. 탕케레는 이 책에서 영성신학의 주요 주제들을 명료하게 정리하여 설명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실천적인 신앙에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이 책은 다행히 우리말로 번역되어 출판됨으로써 국내 신자들이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전의 영성신학



가톨릭신문  2013-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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