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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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해·창간 86주년 기획 - 현대 가톨릭 신학의 흐름] (18) 가톨릭 철학의 흐름과 동향 2 - 다양성을 인정하는 영원한 진리 추구

다양한 체험·관점 통한 ‘불변의 진리’ 추구 바람직/ ‘영원 불변 진리 추구’ 반드시 폐쇄적일 필요 없어/ 각 사상들 지닌 장점이 더욱 큰 역할 할 수 있어/ 마레샬·칼 라너·코레트 등 철학자 시도 대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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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종종 현대 사회를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이라는 용어로 규정하는 것을 만나게 된다. 이 용어는 본래 미학적이거나 기술적인 현상과 관련해서 사용되다가 철학을 비롯한 다양한 영역으로 확장되었다. 이 용어를 ‘탈(脫)-근대’ 또는 ‘후기-근대’로 볼 것인가 등에 관한 다양한 논쟁은 학자들에게 맡겨 놓고 이러한 사상의 주요 경향에만 주의를 기울여 보자. 이러한 사상의 일부 대표자들은 “확실성의 시대는 확연히 지나갔고, 인간 존재자는 이제 모든 것이 잠정적이고 일시적인, 총체적 의미 부재의 지평 속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신앙과 이성」 91항)고 주장한다. 이들이 모더니즘을 비판하고자 하는 내용의 타당성은 인정하더라도 이러한 입장이 절대화될 경우, 영원하고 불변하는 진리에 기반을 두고 있는 종교의 확실성 전반에 대해서도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들이 변형시키거나 극복하고자 하는 ‘모더니즘’의 특징이란 무엇인가?



모더니즘의 기원과 전개과정

중세 말기의 혼란을 겪었던 인문주의자들은 아무런 종교나 정치적인 제약이 없이 학문을 탐구하는 것에 대한 열망을 느꼈고, 이러한 경향은 새로이 등장하게 된 자연과학의 발달에 의해서 더욱 가속화되었다. 기존 학자들의 사상을 답습하기에 급급한 대학 분위기에 환멸을 느꼈던 학자들은 새로운 학문 방법론을 개발하는데 전념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인간 바깥에 있는 객관적인 사물이나 사태보다는 지식을 만들어내는 주체에 대해 관심이 집중되게 된다. 이러한 ‘내재의 원리(principii immanentiae)’를 중시하는 사상들은 과거에는 논의의 여지 없이 받아들여지던 가르침들에 근본적으로 의문을 제기했다. 회칙 「신앙과 이성」도 근대로부터 시작된 새로운 시도를 통해 “우리의 지식과 지혜의 유산이, 논리학, 언어 철학, 인식론, 자연 철학, 인간학, 그리고 인식의 감정 차원에 대한 더욱 심층적인 분석과 자유에 대한 실존 분석적 접근 등 참으로 여러 영역에서 풍요로워졌음”(91항)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인간의 이성을 토대로 감정과 종교적 초월의 영역까지를 모두 포괄하려는 헤겔 사상의 전체주의적인 체계 안에서 그 정점에 도달하게 된다. 이러한 전체주의적인 성향에 대한 강한 반발로 개별자의 소중함을 강조하고 이성으로 포괄되지 못하는 감정과 몸의 영역의 중요성을 새롭게 탐구하는 등의 정당한 비판이 시작되었다.

모더니즘에 대한 비판과 상대주의 등장

과도한 체계화에 대한 비판 과정 안에서 인간 이성이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가 시작되었고, 이는 사회 전반에 비합리주의적인 상대주의가 나타나게 되었다. 물론 회의주의적인 전통은 최근에서야 나타난 것이 아니다. 회의주의적인 전통은 역사적으로 매우 오래 된 것으로 가장 극단적인 형태는 진리가 결코 존재할 수 없으며, 존재하더라도 인식하거나 전달할 수 없다는 파괴적인 지식론을 주장했던 고르기아스에게서 나타난다. 그러나 현대의 상대주의적인 경향은 오히려 후대에 등장한 좀 더 온건한 아카데미아파의 회의론에 가깝다. 이들은 제한된 이성 능력을 지닌 인간들이 절대적인 진리를 알 수 없기 때문에, 부분적이고 상대적인 진리, 즉 ‘진리 같은 것’에 만족하며 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태도는 충분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근대 이후에 인간 이성을 과도하게 절대화하면서 생겨난 부작용들만 보더라도 인간 이성의 한계를 자각하며, 인간의 제한된 능력에 만족하며 살아가려는 겸손함까지 지니고 있는 듯하다. 또한 이렇게 이성 또는 이와 동일시되는 남성이나 기득권 세력이 모든 것을 자신의 기준에 따라 판단하려는 경향에 대해 비판함으로써 여성주의나 문화상대주의가 발생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기도 했다.

상대주의가 드리운 그림자

그렇지만 이러한 태도의 뒤에는 이론적인 착각과 실천적인 측면에서의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을 수 있다. 실천적인 측면에 대해서는 다음 호에서 집중적으로 다룰 예정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이론적인 착각의 측면만을 좀 더 고찰해 보자.

이들의 비판에서는 교조주의적인 주장과 영원한 진리에 대한 건전한 신뢰를 혼동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인간 이성을 절대화하는 경향은 비판받을 만하지만,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는 영원한 진리의 존재를 인정하며, 이것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 끊임 없이 노력하겠다는 태도는 앞의 경향과는 크게 다른 것이다. 실제로 시간을 초월해서 존경받는 철학자 소크라테스도 바로 ‘무지(無知)의 지(知)’를 깨달은 후에 모두 함께 노력해 ‘영원하고 불변한 진리’로 나아가고자 함으로써 이런 정신을 실천하고자 했던 것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문헌도 “인간 지능은 현상 세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므로, 비록 죄의 결과로 어느 정도 흐려지고 약해지기는 하였지만 인식 대상의 실체를 참으로 확실히 파악할 수 있습니다”(「사목 헌장」, 15항)라고 진리 인식의 가능성을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다.

회칙 「신앙과 이성」은 더 나아가 토마스 아퀴나스와 보나벤투라와 같은 “스콜라 철학자들이 말하는 사물과 지성의 일치(adaequatio rei et intellectus)를 통해서 객관적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인식 가능성을 확증”(82항)하고 있다. 계속해서 이 회칙은 성경이 언제나 “명백하고 단순한 진리를 인식하고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음을 밝힌다. 그렇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현상주의적이거나 상대주의적인 철학은 하느님 말씀 안에서 발견되는 풍부한 보화들에 대한 더욱 심층적인 탐구를 돕는 데 부적절”하며, 이를 위해서는 “완벽하지는 못하더라도 객관적으로 진실한 인식의 가능성을 부인하지 않는 철학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전체주의적인 폭력으로 변질될 수 있는 독단적인 주장만을 일삼는 극단은 피해야 하지만 그것을 피하려다가 모든 진리에 대한 가능성을 부정하는 또 다른 극단에 빠져서는 안 된다.

다양성에 열려 있는 영원한 진리

더욱이 일부 학자는 ‘영원 불변한 진리’를 강하게 주장했던 플라톤을 ‘열린 사회의 적’으로 규정하며, 이러한 진리를 추구하는 모든 학자들을 폐쇄적인 닫힌 사상가로 매도하고 있다. 그렇지만 타인의 다양한 견해를 존중하는 태도와 영원한 진리를 추구하는 태도는 서로 모순된 것이 아니다. 즉 ‘영원 불변한 진리’를 추구하는 자세가 반드시 폐쇄적이 될 필요는 없다. 그 진리의 존재와 그것으로 나아가는 길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이것에 도달하기 위해 나아가는 사람들이 선택하는 구체적인 길은 다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거대한 산의 정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고 해서 그것에 오르기 위한 길이 하나뿐임을 주장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또한 지난 세기에 해석학과 언어 분석이 발달하면서 신앙의 이해에 매우 유용하게 활용되기도 했지만, 일부에서는 인간 언어 능력의 부족을 핑계로 종교적인 진리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주장도 대두되었다. 그러나 절대적으로 묘사될 수 없는 대상에 대해서는 어떠한 사랑이나 소통도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은 설득력을 지니지 못한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돌다리를 두들겨 보고도 건너지 않는 사람은 결코 물에 빠지지 않지만, 또한 결코 저편으로 건너갈 수도 없는 것이다. 회칙 「신앙과 이성」(84항)은 명시적으로 “신앙은 분명히 인간의 언어가 신적이고 초월적인 실재를 보편적인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제4차 라테라노공의회, DS 806 참조) 이를 위해 유비(類比·analogia)를 통한 진술 방식을 제안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언어의 한계를 자각하고, 다른 사람들의 체험과 관점으로 자신의 관점을 보충해 가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수정을 위해 노력함으로써 다 함께 영원한 진리를 추구해 갈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확신을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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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13-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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