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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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해 · 창간 86주년 기획 - 현대 가톨릭 신학의 흐름] (19) 가톨릭 철학의 흐름과 동향 3 : ‘세상의 행복’을 넘어서는 ‘진정한 행복’의 추구

진정한 행복, ‘영원불변한 하느님’ 통해서만 가능/ 갈수록 개인 안에서 행복 찾고 ‘초월적 존재’에 무관심/ 이성·양심만으로는 ‘한계’ … 보편적 진리 추구 어려워/ 인간성-신성 보존된 ‘육화된 말씀’에 궁극적 의미 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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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주의·무신론이 가져온 ‘의미의 위기’

영원하고 불변한 진리에 대한 확신이 사라진 현대 사회에서 심각한 문제로 떠오른 것이 바로 ‘의미의 위기’이다.

이론적인 회의주의로부터 시작한 불안감은 세계와 인생을 해석하는 관점들의 다양성 안에서 자칫 냉소주의와 허무주의(nihilismus)로 빠져들 수 있다. 회의주의가 독단적인 사상체계에 대한 반발로 등장했듯이, 이러한 허무주의도 인간 능력에 대한 과도한 기대에 대한 반작용으로 등장한 것처럼 보인다. 근대 이후에 발전한 “다양한 철학 체계들은 사람들이, 그들이 자기 자신의 절대적 주인이고 자기 운명과 미래를 완전히 자율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고 믿고 자기 자신과 자기 능력들만을 신뢰하도록 현혹”(「신앙과 이성」 107항)시켰다. 인간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게 된 이들은 역사의 흐름에 따라 이성은 끊임없이 진보하며 모든 행복과 자유를 성취하리라고 보는 ‘합리주의적 낙관주의’를 주장했다.

그렇지만 이러한 낙관적인 기대감은 20세기에 들어서며 체험했던 가공할 결과를 통해 처참하게 무너졌다. 제1·2차 세계대전이란 엄청난 참상 앞에서 인간들은 근본적으로 이성중심의 근대적 사고가 인간에게 점점 더 행복을 가져다주리라는 기대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물질적인 풍요와 편의를 제공해 주던 과학과 산업의 발전이 환경오염을 비롯해서 전 지구적인 위기를 가져오자 이성에 대한 의심은 더욱 강해졌다. 20세기 전반기를 특징지어 온 이러한 실망과 의심을 통해서 허무주의는 점차 확산되었다. 허무주의에 따르면, 인생은 덧없이 지나가고 찰나적이기 때문에 의미있는 일을 위한 결정적인 투신이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신앙과 이성」 91항 참조). 이러한 허무주의가 가져온 절망의 유혹이 21세기에 접어든 우리를 무섭도록 위협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의 위기’가 다가왔을 때 기존의 종교들은 충분한 해답을 제시하지 못했다. 더욱이 근대를 지나며 민주화된 서구 세계에서 그리스도교는 기득권자들의 편으로 간주되며 급격하게 그 영향력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일부 지성인들은 이러한 기성 종교에 대한 실망감으로 인해 ‘무신론적 인본주의’(humanismi athei)라는 경향에 심취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의 대표자들은 종교를 인간이 지닌 충만한 합리성을 소외시키는 ‘민중의 아편’이라고 폄하했고, 자신들의 사상체계가 기존의 종교를 대체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이러한 무신론의 체계는 그 이전보다 더욱 강하게 인간들을 소외시키는 모순된 결과를 낳았으며, “정치적-사회적 영역에서 인류에게 재앙을 가져다 준 전체주의적 체계들로 귀결”(「신앙과 이성」 46항)되고 말았다. 대표적인 전체주의 체계를 지녔던 옛 소련이 1989년에 붕괴되면서 이런 이데올로기는 현실적으로 실패하고 말았지만, 서구를 중심으로 허무주의와 무신론적인 경향이 널리 퍼지면서 현세적인 행복을 절대화하는 경향이 생겨났다. 현대인들은 행복을 점점 더 자기 자신 안에서 찾고, 일체의 초월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내재의 테두리 안에 갇히고 말았다.



 
▲ 한 신자가 피정 중 기도를 바치고 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이야기처럼 진정한 행복은 하느님과의 만남을 통해서만 도달 가능하다.
 

상대주의·개인주의 극복 통한 의미 추구

회칙 「신앙과 이성」(90항)에 따르면 허무주의나 현세 행복에만 매달리는 입장은 “하느님 말씀의 내용과 요구들에 대립”될 뿐만 아니라 “인간성의 부정이고 인간의 정체 자체에 대한 부정”이다. 왜냐하면 “성서 속에서 발견되는 ‘철학’의 근본적 확신은, 세계와 인간 생명은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오는 그 충만을 추구”(「신앙과 이성」 80항)하기 때문이다. 인간 본성과 신성이 각기 자율성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는 육화된 말씀의 신비야말로 인간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의미에 관련된 수수께끼를 푸는 핵심적인 열쇠인 셈이다. 그래서 가톨릭 철학자라면 바로 이 육화의 신비 앞에서 각 사람이 추구하는 궁극적이고 총괄적인 의미를 탐구해야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더 나아가 허무주의는 유한한 인간 존재의 근원을 제공해주는 존재 자체를 망각하게 만듦으로써, 인간 존엄성을 지탱하고 있는 토대와의 접촉을 빼앗아 버린다. 존재 자체와의 연관성을 반성할 수 없는 인간은 자신이 ‘신의 모상’이라는 희망적인 사실을 발견하지 못하고, 점점 더 파괴적인 힘만을 추구하거나 희망 없는 고독으로 빠져들고 말 위험에 처하게 된다. 에디트 슈타인과 마리탱도 지적한 바와 같이, 일단 인간 존재자가 자신의 근원적인 원리를 망각하고 참된 진리에 접근할 가능성을 잃어버리면, 근대의 인간들이 지상 과제로 여겼던 온전히 자유로워지려는 시도는 성공할 수 없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인간의 구원자」(12항)에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2)라는 표현을 분석함으로써 ‘진리와 자유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 흥망을 함께 한다’고 가르쳤다.

이와 같이 진리와 자유 사이의 밀접한 연관성을 인정하는 순간 윤리적으로 주의해야 할 몇 가지 중요한 경향들이 드러난다. 우선 실용주의(pragmatismus) 등으로 대변되는 윤리적 상대주의의 위험성을 주목해야 한다. 이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오직 상대주의만이 관용, 사람들 사이의 상호 존중, 다수 결정의 수용 등을 보장해 주는 반면에, 도덕적 규범들은 권위주의와 배타적인 태도로 이끌어 간다고 생각한다. 실용주의에 따르면 어떤 행동이 허용될 수 있느냐의 여부는 다수로써 결정될 뿐, 윤리적 선택의 기준은 불변의 가치들에 토대를 두고 있지 않다. 이러한 윤리적 태도는 가장 바람직한 정체로 인정받은 민주주의의 확산과 함께 현대 문화의 대부분을 특징짓고 있다.

그러나 회칙 「생명의 복음」(70항)에 따르면 “이러한 입장에 어떠한 오해와 모순들이 숨어 있는지를 드러내 보여주는 것은 바로 생명에 대한 존중이라는 문제”(다음 호에 게재될 내용 참조)이다. 우리나라의 황우석 교수 사건에서 드러났고, 히틀러에 대한 독일 국민의 전폭적 지지에서 더욱 분명히 드러난 것처럼, 다수의 열광이 곧 도덕성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다. 만일 집단적 양심이 모호해지는 비극적인 결과로 도덕률의 기본 원칙들까지 의문시 된다면 민주주의 체제 자체의 토대조차 위험에 빠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도덕적’ 가치는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이 체제와 독립적이고 보편적으로 인정될 수 있는 도덕률에 얼마나 일치하는지에 달려 있다.

뛰어난 윤리학자이기도 했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또한 자신의 회칙 「진리의 광채」에서 개인주의 윤리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지난 호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인간 이성으로 파악할 수 있는 선에 대한 보편적 진리의 개념이 상실된 이상, 양심의 개념 역시 변하



가톨릭신문  2013-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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