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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성월 기획] 갈매못·서짓골, 이곳에 순교 성인들이 있었네! (1)

죽음의 순간까지 지킨 ‘신앙의 용덕’ 장소/ 다블뤼 주교 등 다섯 성인 순교터/ 1925년 치명터 발견 성지 기반 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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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 왜 떠십니까? 무서우십니까?”

“신부님! 왜 떠십니까? 무서우십니까? 지옥과 천국이 한 순간에 달려 있습니다!”

귀에 화살을 꽂은 채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오매트르 신부와 위앵 신부가 이를 부딪치고 떨자 그 뒤를 따르던 황석두는 두 신부에게 순교의 영광을 상기시키며 두려워 말라고 말한다.

병인박해의 광풍이 온 조선 천지에 몰아치던 1866년 3월 30일(음력 2월 14일), 충청도 공충수영 인근 보령의 갈마연(현재의 갈매못성지)에서는 다블뤼 주교, 오매트르 신부, 위앵 신부, 황석두 루카, 장주기 요셉 다섯 순교성인이 군문효수형으로 참수 치명했으니 그날은 바로 주님 수난 성금요일이었다.

본지는 순교자성월을 맞아 ‘갈매못 순교성인의 용덕과 신심’을 조명하는 연재를 기획했다. 양업교회사연구소장 차기진(루카) 박사는 갈매못 순교성인들에 대해 “한국교회 순교성인들의 순교사실과 시신 및 유해 이동경로들은 정확도가 떨어지는 구전으로 전해지는 경우가 많지만 갈매못 순교자들은 상세한 시복재판 기록과 시신 및 유해 이장에 참여한 신자들의 증언이 문서화 돼 있어 교회사적으로 중요한 연구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차기진 박사는 “갈매못 순교자들이 칼에 목이 떨어지는 순간까지 지켰던 신앙의 용덕은 물론 그들의 시신 및 유해를 보존하기 위해 신자들이 목숨을 걸었던 신심은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고 진단했다. 이에 본지는 차 박사의 자문과 자료 협조를 통해 독자들의 순교신심에 불을 붙일 연재를 싣는다.

갈매못 순교터 세상에 드러나다

때는 병인박해로 다블뤼 주교 등 다섯 성인이 갈매못에서 순교한 지 59년이 지난 1925년 7월 5일. 그날은 로마 베드로 대성전에서 기해·병오박해 순교자 79위의 시복식이 거행된 날이다. 한국교회에 첫 복자가 탄생하는 경사스런 날에 부여 금사리본당 3대 주임 정규량 신부(1883~1952)는 시복식에 참석하지 못한 원통함을 달래고자 갈매못 순교자들이 갈매못에서 이장돼 1882년까지 16년간 안장돼 있었던 ‘서짓골’(‘서재골’이라고도 함)을 찾았다.

이튿날 정규량 신부는 자전거를 타고 갈매못 순교자들이 참수치명한 정확한 장소를 찾기 위해 공소 회장 등 노인들과 함께 주변 산천을 유심히 살피며 갈마연으로 가고 있었다. 갈매못 순교터를 찾아 나선 한국교회의 첫 발걸음이었다. 「경향잡지」 제19권 574~577호(1925.9.30.~11.15.)에 이 기록이 있다.

정 신부는 고구마 소쿠리를 들고 밭일을 하는 한 노인을 발견하고 대화를 나눈다.

“나는 초행인데 여기서 갈마연까지는 얼마나 떨어져 있나요?”, “여기서 5리 되고 내 들으니 그 전에 갈마연에서 사람을 많이 죽였다고 합디다.” 정 신부는 귀를 쫑긋 세우고 묻는다. “그 전에 사람을 죽이던 자리며, 장기대(잘린 목을 거는 장대) 섰던 자리를 아실 수가 있겠소? 같이 가셔서 자리를 일러주시면 일 못하시는 손해에 상당한 품삯을 생각할 터이니 가시는 것이 어떠합니까?”, “바빠서 가지 못하겠습니다. 갈마연 가시면 사람들을 만날 것이니 게서 물어보시오.”

마음이 급해진 정 신부가 교우들과 소쿠리를 들고 있던 노인에게 간청하자 노인은 마지못해 정 신부 일행을 따라 나섰다.

다섯 성인이 순교했던 장소에 서 있던 장기대는 30년 전(1890년 무렵)까지 서 있다가 썩어 없어진 채였다. 정 신부가 장기대 섰던 자리를 ‘소쿠리 노인’에게 대라고 하니 노인은 “여긴데 오래돼 없어졌소”라고 약간 머뭇거리는 듯 했다. 정 신부는 의심이 생겨 옆 교우에게 “분명히 알려면 여러 사람의 말을 들어야 하겠으니 동네에 가서 알 만하고 엄숙한 노인을 찾아보라”고 일렀다.

누대에 걸쳐 인근 동네에 살아 온 편응택, 이조용, 김순경은 정 신부에게 “장기대는 저기 서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지만 젊어서는 항상 보았소. 죽인 자리는 여기일 듯 하나 정확히는 알 수 없소”라고 했다. 정 신부가 순교자의 시신을 파묻었던 구덩이 자리를 파 마침내 확인하니 지번이 353번지요 넓이는 20평이었다.

이 땅을 1926년 9월 14일 10원에 매입해 정 신부 자신의 명의로 등기했다. 이후 1929년 1월 ‘서울교구 천주교 유지재단’에 기증했으니, 갈매못성지의 터전이 이 때 마련된 것이다.



 
▲ 갈매못성지에 세워져 있는 ‘순교성인비’.
 
 
박지순 기자 (beatles@catime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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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13-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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