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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성월 기획] 갈매못·서짓골, 이곳에 순교 성인들이 있었네! (2)

“만 번을 죽더라도 성교 배척할 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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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다블뤼 주교가 참수 당하기 전 신자들에게 보낸 ‘마지막 회유문’.
 

예비된 순교의 길

병인년(1866년) 3월 19일, 지금의 서울 한복판에 위치해 있던 좌포도청에는 처절한 고통을 참아내는 신음소리와 함께 포도대장의 호령에 응답하는 포도 군사들의 청령(廳令) 소리가 뒤섞여 요란했다. 다블뤼 주교를 시작으로 위앵 신부, 오매트르 신부, 황석두, 장주기 다섯 성인이 팔다리가 포박된 채 뼈가 으스러지고 밧줄에 살점이 묻어나는 주뢰형을 당하는 순간이었다.

이들은 왜 포도청에 끌려와 죽을 고초를 당하고 있나? 조선 조정에서 ‘사학’(邪學)이라 일컫는 천주교를 믿고 다른 이들에게도 믿게 했기 때문이다. 조정에서 ‘몹쓸 것들’이라 칭했던 천주교 신자들에게 이미 기해년(1839년)과 병오년(1846년)에 대박해가 있었고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신자들이 처참한 형장의 이슬로 스러져갔다. 다블뤼 주교를 비롯한 갈매못 순교 성인들은 먼저 간 순교자들을 목도하며 신앙을 굳건히 지키고 목숨을 내놓을 다짐이 벌써 돼 있었다.

갈매못 순교 성인들은 병인년 3월 7일 제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 주교가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했다는 소식을 듣자, 자신들도 용맹한 그리스도의 군사가 돼 그 역사에 동참해야 할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로부터 나흘 뒤 배론신학교를 이끌던 푸르티에 신부와 프티니콜라 신부가 새남터에서 순교하던 날, 홍주 거더리의 ‘손치호 니콜라오 회장’ 집에 조용히 앉아 있던 다블뤼 주교는 동네 신자들로부터 “경포 10여 명이 공부하던 유다스를 데리고 왔다”는 소리를 듣는다.

유다스는 제천 배론신학교에서 공부하던 신학생 박만억 필립보를 가리키는 것으로 사람들은 박만억이 주교와 신부를 배신했다고 혀를 찼지만 박만억은 “경포들의 겁박에 못 이겨 길을 안내했소”라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다블뤼 주교는 오랜 세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충직한 복사 황석두에게 “나가서 시세를 보고 피해야 옳을지, 잡혀가야 할지 보아라”라고 명했다. 포졸들이 거더리 동네 집집마다 벌집 쑤시듯 뒤져보고 있는 중이었다.

다블뤼 주교는 잠시 성물을 감추고 자신의 몸도 숨기려 했지만 소용없는 일임을 알고 니콜라오 회장 집에 좌정한 채 황석두를 시켜 포졸들을 불러오게 했다. 황석두가 밖에 나가 “포교 중에 으뜸이 되는 이는 이리 들어오너라. 양인(洋人) 잡으러 왔다 하니 우리 주교께서 여기에 계시고, 부르라는 분부가 있으니 들어들 오너라” 일렀다.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 것”

문 앞에 나타난 포교들을 보고 다블뤼 주교가 담배를 태우며 위엄을 갖춰 “들어 오너라” 하자 포교들은 공경하는 모습으로 무릎을 꿇고 주교 앞에 앉았다. 포교들은 동네 주민들에게는 욕을 해대며 행패를 부렸지만 주교에게는 예의를 갖췄다. 주교가 잡힌 후 위앵 신부는 주교의 전갈을 받고, 오매트르 신부는 스스로 주교를 찾아 왔다. 황석두는 포졸들이 “조선 백성 천주학 하는 이는 그만두고 양인만 잡아오라 하시니 너는 따라오지 말거라” 했지만 “내가 어찌 이제 와서 스승과 떨어지리오?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 것이다”라며 스스로 순교의 길을 택했다.

영광의 순교 길에 동행하게 된 다블뤼 주교와 위앵 신부, 오매트르 신부는 머리에 붉은 몽두(蒙頭, 얼굴 가리개 보자기)를 쓰고, 목에는 행차칼을 찬 채 짚둥우리(중죄인을 이송할 때 태우기 위해 마소 위에 얹는 형구)에 실렸고, 황석두는 목에 행차칼만 찬 상태에서 구경꾼들의 시선을 받으며 병인년 3월 13일 홍주읍을 거쳐 서울의 포도청으로 압송됐다. 그곳에는 배론에서 압송돼 온 장주기가 있었다.

“어려서부터 가르침 받아 뼈에 새긴 것”

“내 몸이 화를 입을지언정 남에게 해를 미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저의 이 다리가 잘라지면 그만입니다”(다블뤼 주교), “어릴 때부터 배운 것 이외에는 아뢸 것이 없습니다. 헤아려 처분하소서”(위앵 신부), “이 세상에서 벌을 입으면 후세에 만인의 덕을 얻을 것입니다. 이는 어려서부터 가르침을 받아 뼈에 새긴 것입니다”(오매트르 신부), “형벌 아래 만 번을 죽더라도 성교(聖敎)를 배척할 리 만무합니다”(장주기), “제가 받아들인 성교는 비록 도거(刀鋸, 칼과 톱) 아래 죽더라도 미혹되거나 변함이 전혀 없는 도리입니다”(황석두) 「좌포도청등록」에 기록된 순교자들의 증언이다.


박지순 기자 (beatles@catime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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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13-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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