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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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가톨릭 신학의 흐름] (26) 뉴에이지 운동에 대한 조직신학적 비판 ② : 십자가 없는 우주적 그리스도론의 위험성

신앙 내용·그리스도교 정체성 왜곡 가장 심각한 문제/ 십자가 사건 통한 세상 구원의 의미·가치 거부/ 역사적 예수-신앙의 그리스도 일치성 또한 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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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뉴에이지 운동이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해 위협적인 도전으로 떠오르는 것은 그 강력한 사회적 전파력으로 인해 발생하는 사목적 차원의 문제 때문만은 아니다. 사실, 서구의 많은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이 뉴에이지에 심취하여 그리스도교를 떠나가는 것이 보고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뉴에이지가 그리스도교 ‘신앙의 유산’을 일부 수용하는 듯하지만, 사실상 그것을 혼합주의(syncretism)적 차원에서 변질시켜 그리스도교 신앙의 고유한 메시지를 왜곡시키는 데에 있다. 이는 사목적 차원에 앞서 신앙교리적 차원의 근본적 문제이다.

이처럼 신학적·사목적 차원에서 뉴에이지 문제를 집중적·전반적으로 다룬 교회 문헌을 소개한다면, 교황청 문화평의회(Pontifical Council for Culture)와 종교간대화평의회(Pontifical Council for Interreligious Dialogue)의 2003년 공동 문서 ‘생명수를 지니신 예수 그리스도 : 뉴에이지에 관한 그리스도교적 성찰’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겠다.

그리고 2004년 바티칸에서 열린 세계적 차원의 국제회의를 통해 발표된 ‘뉴에이지에 관한 사목적 성찰을 위한 지침들’에서도 다음과 같이 뉴에이지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뉴에이지는 교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뉴에이지는 신앙의 내용과 그리스도교 정체성을 흐린다. 뉴에이지의 두드러진 특징들이 지니는 상대주의나 주관주의와 같은 문제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이중 소속’ 현상이 흔하며, 이는 혼합주의에 빠질 수 있다. 뉴에이지 정신과 신앙이 양립할 수 없음을 인식하지 못하는 비전문인들은, 복음의 핵심, 곧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과 맺는 관계에서 멀어질 위험이 있다.”(7항)

십자가 사건의 구원론적 신비를 부정하는 뉴에이지

여기에 언급된 여러 심각한 문제점들 중 가장 먼저, 역사적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죽음이 드러내는 구원론적 의미와 가치에 대한 뉴에이지의 거부 혹은 평가절하 문제를 지적할 수 있다.

뉴에이지의 그리스도론적 주장과 그리스도교 신앙이 선포하는 복음적 메시지 사이에 존재하는 결정적 차이점들 중 하나는 바로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라는 핵심적 신앙고백이다.

하느님의 육화(incarnation)는 하느님께서 단순히 사람의 외적 형상만을 취하셨다는 것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이는 하느님께서 바로 사랑 때문에, 인간의 삶뿐만 아니라 그 죽을 운명의 나약하고 비참한 조건을 모두 수용하셨음을 의미한다.

반면에 뉴에이지는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서 고통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배제하고자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부인하거나 재해석하려고 시도한다.

역사 안의 모든 영지주의(靈知主義) 흐름들 혹은 그리스도교 전통의 주변에 기생하며 자라나는 여러 ‘유사 영성 운동들’이 시도하는 바는, 바로 하느님을 이 땅의 ‘먼지’로부터 분리시켜 인간과 동떨어진 고귀한 존재로만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육화에 대한 거부는, 비록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지만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어 구원을 지향하는 인간 존재(창세 1,26-27 참조)에 대한 경멸이며, 본성(nature)과 은총(grace)이 교차하는 인간의 역설적 실존에 대한 왜곡이다.

이처럼 지상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 그리고 죽음의 의미를 어떤 식으로든 축소하고자 하는 신영지주의 노선에 서 있는 뉴에이지 운동은 당연히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이 드러내는 구원론적 의미를 간과하거나 거부할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해 신약성경의 요한 서간은 매우 의미있는 내용을 제공한다.

요한의 첫째 서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으로 오셨다고 고백하는 영은 모두 하느님께 속한 영”이지만,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지 않는 영은 모두 하느님께 속하지 않는 영”이며 “‘그리스도의 적’의 영”이라고 제시한다(4,2-3 참조). 요한의 둘째 서간 역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으로 오셨다고 고백하지 않는 자들”은 “속이는 자이며 ‘그리스도의 적’”이라고 말한다(7절 참조).

요한 서간의 이러한 설명은 초대 교회에 존재하였던 영지주의적 이단 계열의 한 분파인 가현설(假現設)의 추종자들을 반박하는 듯이 보인다. 그들에 따르면, 세상 창조 이전부터의 신적 기원을 지니고 있는 로고스(Logos)는 인간의 나약하고 비참한 육체적 조건을 그저 겉으로만 취한 것처럼 나타났다고 한다. 그래서 로고스의 신성(神性)에 적합하지 않다고 간주되는 예수님의 지상 행적, 즉 수난과 고통 그리고 십자가와 죽음은 모두 거부되기에 이른다.

죄만 빼고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신(히브 4,15 참조)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그리스도교 신앙고백은 뉴에이지의 ‘십자가 없는 우주적 그리스도’ 개념과 전망에 대하여 결정적인 차별성을 제공한다. 육화하신 그리스도, 즉 역사의 예수님을 말함에 있어, 십자가 사건을 통한 그분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은 그리스도교 신앙고백의 가장 본질적인 요소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뉴에이지에는 이러한 수난의 자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고통이란 어리석고 무익한 것이라고 치부된다. 따라서 십자가의 고통과 수난을 통해서 세상이 구원되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로 여겨진다. 십자가 사건은 순전히 인간적 차원에서 발생한 사건이었을 뿐이며, 나자렛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우주적 그리스도의 발현은 아마도 십자가상 죽음 이전에 다시 분리되었을 거라고 간주된다.

반면에, 그리스도교 신앙에 있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부활을 향한 여정의 필연적 요소로서 구원 신앙의 핵심적 메시지를 구성한다. 신약성경의 복음서들은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심을 통해서 부활의 신비가 성취됨을 역설한다(참조: 마태 16,21 마르 8,31 루카 9,22). 또한 바오로 서간이 증언하는 바와 같이, 초대 교회는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을 통해서 죄 많은 인간이 의로움을 얻고 하느님과의 화해가 이루어지게 되었음을 선포한다(로마 5,6-11 참조).


 
▲ 뉴에이지의 ‘우주적 그리스도론’은 예수의 십자가상 수난과 죽음의 구원론적 가치를 거부한다.
그리스도교 신앙 고백의 핵심에 자리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단일한 위격 개념’까지 흔들면서 신앙의 고유한 메시지와 정체성을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뉴에이지가 제공하는 것은 고통 없는 구원관

이렇듯 십자가 사건의 성서적 의미에 대한 조직신학적 차원의 강조는 그리스도인의 실존적 차원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리스도인이란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을 의미한다(갈라 2,19 참조).

그리스도를 따르는 진정



가톨릭신문  2013-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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