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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지하철 화재참사] 김수환 추기경 대구 현지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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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 추기경은 말이 없었다.
김 추기경은 2월22일 오전 대구 시민회관 2층에 마련된 지하철 방화 희생자 합동분향소에 들러 분향한 후 1층 유가족 대기실에 내려가서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유가족과 실종자 가족들의 손을 꼬옥 잡아주기만 했다. 슬픔이나 분노보다 더 격한 인간의 감정은 허탈이라고 한다.

유가족 대기실에서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바닥에 쓰러져 오열하던 한 중년 부인이 마비증세를 보이자 사람들이 팔다리를 주무르면서 119 구급대를 불러댔다. 그 광경을 망연자실 바라보던 김 추기경은 말없이 무릎을 꿇고 부인의 뒤틀리는 손을 주물러 주었다.

잠시 후 김 추기경이 시민회관을 빠져나가자 위로의 한 말씀을 고대하던 기자들의 얼굴에 실망의 빛이 역력했다. 오후에 남산성당에서 추모미사를 마친 후 이문희 대주교 집무실에서 잠시 쉬고 있는 추기경을 조심스레 찾았다.

“이번 대구 지하철 참사는 도무지 말이 안돼요. 유가족들과 인간적 고통을 나누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은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가 않아요.”
잠시 후 추기경은 “이번 참사는 생명의 가치를 가볍게 여기고 내실보다 외형적 성장에 더 치중하는 우리 사회의 부끄러운 자화상”이라며 “이번 참사는 우리가 그 점을 깊이 반성하고 고치라는 하느님의 경고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 붕괴 대구 상인동 가스폭발사고 같은 대형 인명사고는 모두 안전불감증에서 비롯된 인재(人災)였습니다. 그런 사고가 날 때마다 온 국민이 통탄하고 관계 당국에서 반성과 대책을 쏟아냈는데도 또 사고가 났습니다. 우리는 언제까지 이런 일을 되풀이해야 합니까?”
추기경은 우리 사회의 가치관에 문제의 초점을 맞췄다. 물질적 탐욕에 눈이 멀어 고귀한 생명을 짓밟고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이익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거짓말도 서슴지 않는 사회 풍조가 근본적 문제라고 지적했다.

“생명보다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의 목숨을 무엇과 바꾸겠느냐?’(마태 16 26)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고귀한 생명을 지키지 못하는 사회라면 경제적 성장이나 풍요는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세계적 조류이기는 하지만 한국은 특히 죽음의 문화가 강합니다. 한해 낙태건수가 150만건에 달하는데도 낙태를 한 엄마들조차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합니다. 한탕주의를 노리는 로또복권 열풍 OECD 국가 중 교통사고율 1위인 오명도 극도의 이기주의와 죽음의 문화에 병들어 가는 우리 사회의 한 단면입니다.”
추기경은 “이번 참사에 유독 여성과 노약자의 희생이 큰 이유가 혹시 ‘남이야 어떻게 되든 나만 살면 된다’는 이기주의 탓은 아니었는지 생각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추기경은 이어 자연경관이 좋기로 소문난 호주 브리스번(brisbane)을 여행한 경험을 예로 들었다.

“그곳 한인 신자들이 ‘여기가 지상낙원’이라고 하길래 자연경관이 뛰어나서 그런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라 약자의 생명을 우선적으로 보호하는 시민의식 때문이었어요. 그곳에서는 어린이가 최우선적으로 보호받고 그 다음이 장애인 노약자 부녀자 동물 남자 순이라고 합니다. 우리 사회도 과연 그렇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추기경의 이 말은 강자의 이익이 우선되는 우리 사회의 그릇된 가치관이 이번 참사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는 지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번 참사는 우리의 가치기준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깊은 반성을 통해 생명을 근본적 가치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각자 삶의 자세부터 정직 성실해야 합니다. 그리고 생명의식에 대한 불감증과 안전 불감증을 고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라 전체가 비탄에 빠지는 참사가 또 일어날 수 있습니다.”
추기경은 “온 국민이 지역과 나이를 초월해 희생자들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다”며 “하느님께서 희생자들에게 평안한 안식을 유가족들에게는 위로를 주시길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구로 내려오는 비행기 안에서 한 광주시민을 만났습니다. 광주시민 대표들도 곧 성금을 마련해서 대구를 방문할 예정이라고 하더군요. 고통을 함께 나누려는 온 국민의 정성에 힘입어 유가족들이 다시 일어서기를 바랍니다.”

추기경은 이날 남산성당에서 봉헌된 추모미사 강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신앙인들도 이런 참사 앞에서 ‘하느님은 그 순간 어디에 계셨길래 이런 비극을 막지 못하셨나?’라고 의문을 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 시간에 분명히 희생자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인간의 잘못에서 비롯된 인재의 화염 속에서 함께 숨이 막혀 고통스러워 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희생자들을 부활시키셨을 것입니다.”
한편 추기경은 인터뷰가 끝나갈 무렵 우리 사회에 퍼져가는 반미(反美) 조류와 감정적 친북(親北) 성향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시했다.

만일 미군이 한강 이남으로 철수하면 서울 시민은 물론 외국인 투자자들도 동요할 텐데 그렇게 되면 현재의 평화마저 흔들리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또 군 유지와 무력 증강을 위해 인간의 기본적 생존권을 도외시하는 북한을 객관적으로 보는 안목이 아쉽다고 덧붙였다.

김 추기경은 “노무현 새 대통령은 그 점을 깊이 생각하면서 나라를 이끌어 가기 바란다”고 말했다.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03-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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