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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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 추기경 선종 특집] 탄생에서 선종까지

제 십자가는 여러분들 기도 덕분에 질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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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 추기경은 1922년 음력 윤 5월 8일(양력 7월 2일) 대구 남산동 독실한 구교우 집안에서 부친 김영석(요셉)과 모친 서중하(마르티나) 사이 5남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추기경은 1933년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 예비과에 입학하며 사제가 되기 위한 첫 걸음을 내디뎠다.

이어 1941년 서울 소신학교인 동성상업학교에 입학한 그는 대구교구 장학생으로 선발돼 같은 해 4월 일본 도쿄 조치(上智)대학 문학부 철학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으로 학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던 추기경은 일제의 강압으로 학병에 징집돼 사관 후보생 훈련을 받아야 하는 아픔도 경험했다.

다행히 이듬해 전쟁이 끝나며 조치(上智)대학에 복학한 추기경은 1947년 성신대학(현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 편입하고 1951년 9월 15일 대구 계산동주교좌성당에서 사제로 서품됐다.

수품 후 안동성당(지금의 안동교구 목성동주교좌성당) 주임신부, 1953년 4월 대구대교구장 비서, 1955년 6월 김천성당(지금의 대구대교구 황금동성당) 주임 겸 성의중·고등학교 교장을 지냈다. 일선 본당신부 생활은 안동성당과 김천성당을 합쳐 3년이 채 안되지만 추기경은 이 때를 ‘꿈처럼 아름다웠던 시절’로 회상하곤 했다.

추기경은 1956년 독일 뮌스터대학 유학길에 올라 은사인 요셉 회프너 추기경을 만나게 된다. 회프너 추기경에게 ‘그리스도 사회학’을 배운 추기경은 이 때 그리스도 사상에 기초한 인간관과 국가관 등을 정립하는 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 무렵 광부와 간호사로 일자리를 찾아 독일에 건너온 한국 노동자들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기도 했다.

유학생활을 마친 추기경은 1964년 6월 가톨릭시보사(현 가톨릭신문사) 사장으로 취임했다. 당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한창 무르익던 시기로, 그는 다른 어떤 사제보다 먼저 시시각각으로 들어오는 공의회 관련 외신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1년 8개월간 사장으로 재직하며 그는 ‘세상을 위한 교회’가 되려면 종교 매체도 세상 사람들과 소통해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사회적 사건과 흐름을 신앙적 눈으로 조망하는 주제의 사설을 지면에 자주 실었다.

성무일도를 드리며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부분을 묵상하던 1966년 2월. 당시 김수환 신부는 마산교구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됐다는 소식을 듣는다. 44세의 젊은 나이였다. 김수환 주교가 사목표어로 택한 말씀은 ‘여러분과 또한 많은 이들을 위하여(PRO VOBIS ET PRO MULTIS)’.

이 문구는 서울대교구장에 착좌할 때도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라고 조금 고쳐서 그대로 사용했다.
1968년 김수환 주교는 대주교로 승품되어 제12대 서울대교구장직을 맡게 됐다는, 그의 표현대로 ‘마른 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식을 듣는다.

1968년 서울대교구장에 취임하며 그는 ‘교회의 높은 담을 헐고 사회 속에 교회를 심어야 한다’는 인사말을 통해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에 따른 교회 쇄신과 현실참여의 원칙을 밝혔다.

그리고 이듬해인 1969년 3월 교황 바오로 6세가 발표한 새 추기경 명단에 김수환 대주교의 이름이 올랐다. 한국 최초의 추기경이 탄생한 것이다. 당시 김 추기경의 나이는 47세. 전 세계 추기경 134명 가운데 최연소였다.

30년 동안 서울대교구장으로 재임하며 추기경은 선교사 없이 신앙이 전파된 한국 교회의 형성과 발전이 세계 천주교회 속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1984년 5월 6일 처음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모시고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 기념과 103위 시성식을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개최했다.

순교의 피로 전해져 내려온 한국 교회의 신앙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9년에도 한 번 더 방한해 제44차 세계 성체대회를 주례했다. 당시 세계성체대회에서 각막 기증을 서약한 추기경은 두 사람에게 각막을 기증하고 선종함으로써 20년 전의 약속을 지켰다.

추기경이 우선순위를 둔 이들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었다. ‘교회는 가난한 이들의 눈물을 닦아 주어야 한다’는 믿음에서였다. 바쁜 일정 가운데에도 해마다 성탄 전야에는 소외된 이들을 찾아가 미사를 봉헌했다. 1970년대 민주화 운동의 편에 선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지학순 주교가 구속된 1974년 민청학련 사건, 1978년 동일방직노조 사건 등이 일어났을 때 김 추기경은 성탄·사순 메시지나 강연, 시국담화를 통해 한국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짚어내는 일에 앞장섰다. 추기경은 우리사회 민주화 운동의 버팀목이었다.

추기경은 곧 한국 교회의 얼굴이었고 사회 속에서 천주교의 인식을 높이는 결과를 낳았다. 교구장에 임명된 1968년 당시 본당 48개, 공소 63개, 신자 14만 명이었던 서울대교구의 교세는 그의 재임 30년 동안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여 1998년 말에는 본당 203개, 공소 6개, 신자 125만 명으로 늘었다.

추기경은 1998년 5월 29일 서울대교구장과 평양교구장 서리직을 사임했다. 서울대교구장을 맡은 지 30년, 목자 생활 47년 만이었다.

저서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에서 그는 서울대교구장으로서의 30년을 십자가를 지고 걷는 심정으로 살아왔다고, 힘들고 지쳐 그 십자가를 내려놓고 싶을 때도 많았다고 회고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나를 사랑해 주시는 분들의 기도와 격려가 큰 힘이 됐다. 내가 주님께서 주신 십자가를 벗어 던지지 않고 끌고라도 갈 수 있었던 힘은 많은 이들의 기도에서 나왔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2월 16일. 너무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그 사랑을 이제 나누자고 당부한 추기경은 그의 시 ‘나의 기도’의 소망처럼 당신을 만나기 위해 우리 곁을 떠났다.


■ 연 혁
1922. 5. 8(음력) 대구 남산동에서 출생
1933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 예비과 입학
1935 서울 동성상업학교 을조(소신학교) 입학
1941. 4 일본 조치(上智)대학 예과 입학
1942. 9 일본 조치(上智)대학 문학부 철학과 입학
1944. 1. 21 학병 입대
1947. 9 ~ 1951. 6 성신대학 (현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편입
1951. 9. 15 대구 계산동주교좌성당에서 사제 수품
1951. 9 ~ 1953. 4 안동성당(현 목성동성당) 주임 신부
1956. 10~ 1963. 11 독일 뮌스터 대학에서 신학·사회학 전공
1964. 6. 1~ 1966. 4.30 가톨릭시보사(현 가톨릭신문사) 사장
1966. 2. 15 초대 마산교구장 임명
1967. 9. 29~10. 29 세계 주교 대의원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석
1968. 4. 9 서울대교구장 임명
1968. 5. 29 대주교 승품, 제12대 서울대교구장 착좌식
1968. 10. 6 한국 병인 순교자 24위 시복식 참석 (로마 베드로 대성전)
1969. 4. 28 추



가톨릭신문  2009-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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