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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 추기경 선종 특집] 김수환 추기경이 남긴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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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을 체포하려거든 나를 밟고 지나가시오"
"삶이 무어냐고요? 삶은 계란이죠"

김수환 추기경은 한국 교회의 정신적 지주로서 역할뿐 아니라, 한국 현대사의 고비마다 정권에 맞서며 우리 사회의 정신적 버팀목이 됐다. 그는 또 시국 관련 문제 등 사회적 이슈가 발생할 때마다 사회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이정표를 제시해 온 ‘우리 사회의 큰 어른’이었다. 김수환 추기경이 남긴 어록을 통해 그의 발자취와 숨결을 느껴본다.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한 일침

김 추기경은 특히 70년대에는 인권과 정의 회복을 위해, 80년대에는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6·10항쟁’ 등 독재정권의 소용돌이에 맞서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경찰이 성당에 들어오면 제일 먼저 나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 다음 시한부 농성 중인 신부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또 그 신부들 뒤에는 수녀들이 있습니다. 당신들이 연행하려는 학생들은 수녀들 뒤에 있습니다. 학생들을 체포하려거든 나를 밟고, 그 다음 신부와 수녀들을 밟고 지나가십시오” (1987년 6·10항쟁 당시 명동성당에 경찰력 투입을 통보하러 온 경찰 고위 관계자에게)

김 추기경은 1974년 8월 민청학련 사건에 대한 지학순 주교의 양심선언 자리에서 “주교님, 양심대로 하십시오. 우리야 가진 거라곤 양심밖에 없지 않습니까”라고 호소했고, 1980년 설 인사차 방문한 전두환 당시 육군 소장에게는 “서부 활극을 보는 것 같습니다. 서부 영화를 보면 총을 먼저 빼든 사람이 이기잖아요”라며 일침을 가하기도 했다.

그는 1987년 명동성당에서 봉헌된 ‘박종철군 추모 및 고문 추방을 미사’에서는 “지금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너희 젊은이, 너희 국민의 한 사람인 박종철은 어디 있느냐? ‘그것은 고문 경찰관 두 사람이 한 일이니 모르는 일입니다’하면서 잡아떼고 있습니다. 바로 카인의 대답입니다”라며 울분을 토했다.

또 “위정자도 국민도 여당도 야당도 부모도 교사도 종교인도 모두 이 한 젊은이의 참혹한 죽음 앞에 무릎을 꿇고 가슴을 치며 통곡하고 반성해야 한다”며 “이제까지 우리가 부끄럽게 살아온 그의 죽음 앞에 새롭게 태어나 그가 못다 이룬 일을 뒤에 남은 우리가 이룬다면 그의 죽음은 절대 헛되지 않으리라 확신한다”고 덧붙였다.

김 추기경은 ‘1978년 동일방직 노조 탄압사건’ 때에는 정의 평화를 위한 기도회를 열어 “126명이나 되는 여성 근로자들이 해고되고 또 그 와중에서 상당수의 사람들이 구속 및 입건되는 사태까지 빚고 있는데도, 사회의 공익을 위해 존재하고 여론 형성의 큰 영향력을 가진 주요 일간지와 방송 미디어들이 오늘까지 한마디도 여기에 관해서 보도하지 않고 있습니다”라며 여론을 일으키기도 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대변

1970~80년대 암울했던 시절 김수환 추기경은 민초들이 바라보는 등불과도 같았다. 언제나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향한 김 추기경의 사랑은 그래서 더욱 울림이 컸다.

“우리 자신이 변해야 세상이 변합니다. 우리들 하나하나가 진실한 인간, 정의의 인간, 사랑의 인간이 되어야 세상이 진리와 정의와 사랑으로 가득 찬 세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묵은 내가 죽고, 새로운 나, 그리스도를 닮은 새 인간이 내 안에서 나고, 자라고, 성숙해지는 것입니다” (1980년 4월 24일 영등포교도소 미사 강론에서)

김 추기경은 1995년 12월 4일 일본군 위안부 인권 회복을 위한 기도회에서는 “병사들의 성적 욕구 충족을 위해 여성을 전쟁터에 강제로 끌고 가서 강간을 일삼은 것은 분명히 윤리와 도덕에 반하고 여성에 대한 더할 수 없이 큰 모독이며 용서받을 수 없는 인권 유린이다”면서 “일본은 과거 제국주의 시대에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범한 모든 반인륜적·반도덕적 죄를 깊이 인식하고 뉘우치고 사죄해야 합니다. 그럴 때 일본은 참된 의미로 우리의 이웃이 될 수 있고 일본 자신도 큰 나라로 인정받을 것입니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 1999년 7월 2일 서울구치소의 사형수들을 찾아 “언제 어떻게 죽느냐? 하는 차이는 있어도 결국 다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는 여러분이나 저나 이 자리에 있는 누구나 세상사람 모두 같습니다. 그러기에 사형수라는 처지가 결정적인 것은 아닙니다. 결정적인 것은 주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얻느냐? 얻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주님은 바로 우리 인간이 죽음의 운명을 쓰고 절망에 빠져 있을 때 우리를 위해 오셨고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구원하셨습니다”라고 전하기도 했다.

김 추기경은 외국인 근로자들에 대한 사랑도 각별했다.

“여러분들은 고향과 가족을 두고 여러분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위해 머나먼 나라인 한국으로 떠나 왔습니다. 여러분은 때로는 향수병으로,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떨어져 있음으로 해서 힘드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설상가상으로 여러분은 때때로 부당하거나 혹독한 대우를 받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이는 끔찍한 일이며, 저는 그와 같은 일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길 바라고 기도합니다” (1994년 4월 24일 외국인 근로자를 위한 첫 미사 강론에서)

우리 사회의 참사가 일어났을 때에도 김 추기경은 늘 현장에 있었다.

그는 1983년 미얀마 아웅산 참변 희생 100일 추모미사에서 “미얀마의 수도 랭군에서 여러분의 사랑하는 이들이 폭사할 때 하느님도 함께 폭사하셨고, 그 기막힌 죽음의 쓴 잔을 하느님도 함께 마셨다”며 희생자들을 위로했다.

또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희생자들을 위한 미사에서는 “우리는 외양으로는 그럴싸하게 화려하게 큰 집을 짓고 새 도시를 건설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참으로 모래 위에 지은 사상누각에 불과하였습니다. 인간과 인간 생명이 모든 가치 중에서 제일간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살아왔더라면, 그리고 누구보다도 우리 정치인과 경제인들에게 이런 인간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돈이나 권력에 대한 욕망에 앞서 있었더라면 이런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라며 애통해했다.


따스한 인간미

“내 삶을 돌아볼 때마다 가장 후회스러운 것은 더 가난하게 살지 못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다가가지 못한 부분이다. … 우리는 예수님의 삶에 감탄하는데, 분명한 것은 그 삶은 우리에게 감탄하라고 보여주신 게 아니라 그대로 따르라고 제시해준 것이라는 점이다” (저서「추기경 김수환 이야기」중에서)

인간 김수환은 참으로 가난하고 소박했다. 그러나 마음만은 늘 부자였다.

‘옹기장학회’에 얽힌 사연이 대표적이다. 김 추기경은 2002년 자신의 세례명을 딴 ‘스테파노 장학회’ 설립을 제안받자, 대신 자신의 아호를 따 ‘옹기’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그는 “옹기는 천주교 박해시대 때 신앙 선조들이 산 속에서 구워 내다팔면서 생계를 잇고 복음을 전파한 수단이자 좋은 것과 나쁜 것, 심지어 오물까지 담을 수 있는 것”이라며 그 깊은 뜻을 밝혔다.

김 추기경은 “은퇴 후 운전면허증을 따서 방방곡곡을 자유롭게 다니고 싶다”는 말



가톨릭신문  2009-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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