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7일
기획특집
전체기사 지난 연재 기사
[김수환 추기경 선종 특집] 김수환 추기경 업적(교회 부문)

대내외에 한국교회 위상 떨친 한국인 첫 추기경

폰트 작게 폰트 크게 인쇄 공유

아시아 주교회의 연합기구 창설 주도
1984년 103위 시성식 기적심사 `기적
`


 
▲ 김수환 추기경은 1980년대 조선교구설정 150주년 기념대회(1981년), 한국천주교회 200주년 기념 신앙대회 및 103위 시성식(1984년), 제44차 서울 세계성체대회(1989년) 등 굵직한 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러냈다.
사진은 제44차 서울 세계성체대회 때 고(故)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함께 서 있는 모습.
 

    사람들이 김수환 추기경에게 이런 질문을 자주 했다.
 "성직자로 살아오시는 동안 가장 행복한 순간이 언제였나요?"
 추기경의 대답은 항상 같았다.
 "가난한 신자들과 울고 웃었던 본당신부 시절이 제일 행복했어요."

본당신부 시절이 제일 행복

 1951년 사제품을 받고 성직의 길에 들어선 김 추기경은 본당신부 생활이라고 해봐야 안동본당(현 목성동본당)과 김천본당(현 김천 황금본당)을 합해 고작 2년 반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그 짧은 추억을 소중하게 품고 한 평생을 살았다.

 신자들과 동고동락하는 행복은 고위 성직자가 되는 순간부터 그에게서 멀어졌다. 1966년 초대 마산교구장으로 임명돼 사목 일선을 떠나야 했다. 그는 마산교구장 시절에 "시골본당으로 사목방문 나갈 때가 가장 즐겁다"는 말로 아쉬움을 내비치곤 했다.

 마산교구에서 나름대로 신설교구 기초를 닦느라 분주했지만 뚜렷한 업적을 남기지는 못했다. 사목계획을 펼치기도 전에, 그러니까 정확히 2년 만에 서울대교구장으로 임명됐기 때문이다.

 당시 성직의 길에 들어선 지 17년밖에 안 된 데다 서울에 아무런 연고가 없는 시골 주교가 서울대교구장이 되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이 때문에 교구 일각에서 당혹스러워하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그는 교회와 사회를 위해 자신을 온전히 바치겠다는 각오를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Pro Vobis et Pro Multis)라는 사목표어에 담아 드러냈다.

 당시 서울대교구는 부채가 많고 사제들이 분열되는 등 복잡하게 얽힌 현안이 많았다. 이 때문에 채권자들에게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 사정하면서 교구를 추스려야 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69년 한국교회 최초의 추기경이자 당시 전 세계 추기경들 가운데 가장 나이 어린 추기경이 됐다.

 교황 바오로 6세의 필리핀 방문 기간에 한국 주교회의 의장 자격으로 그곳에 가서 아시아 주교회의 연합기구 창설을 주도한 점은 특기할 만하다.

 아시아 주교들은 교황 방문에 맞춰 처음 8일간 회의를 가졌는데 추기경은 그 자리에서 "이런 회의기구를 정식으로 만들자"고 발의해 압도적 지지를 이끌어냈다. 그 회의기구가 아시아 교회들의 교류협력을 촉진하고, 아시아교회를 대변하는 현 아시아 주교회의연합회(FABC)다.

 1980년대는 한국교회 교세 급팽창기였다. 이때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대회(1981년), 한국천주교회 창립 200주년 기념 신앙대회와 103위 시성식(1984년), 제44차 서울 세계성체대회(1989년) 등 굵직한 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러 한국 가톨릭을 대내외에 알린 주역이 김 추기경이다. 그가 1969년 추기경에 서임될 당시 2.5에 머물던 한국 천주교 신자비율은 1998년 서울대교구장 퇴임시 8를 넘어섰다.

 사람들은 100만 인파가 여의도 광장에 발 디딜 틈 없이 들어찬 가운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주례로 거행된 200주년 기념행사를 한국교회 역사상 가장 가슴 벅찬 순간으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사실 103위 시성식은 지금도 `기적`이라고 얘기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추진과정이 힘들었다. 특히 시성추진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기적심사는 매우 까다로운 문제였다. 시성 대상자의 기도나 행위 등으로 기적이 있었음을 증명해야 하는데 박해시대 순교자들 행적에서 그 점을 무슨 수로 찾아내 증명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로마 밖에서 시성식을 거행하는 것도 극히 드문 일이었다.

 추기경의 청원서 한 통이 교황과 바티칸 당국자들 마음을 움직였다.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신앙을 증거한 신앙 선조들 사이에서 왜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겠습니까. 다만 그것을 증명하지 못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순교자들로 인한 기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100년에 걸친 박해 잿더미에서 교회가 다시 일어서고, 복음이 퍼져나가 한 해 영세자가 10만 명에 달하는 게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서울 세계성체대회는 젊고 활기찬 한국교회를 전 세계에 알리는 데 큰 몫을 한 국제행사다. 추기경은 성체대회 정신을 실천하기 위해 한마음한몸운동을 태동시켰는데 이는 한국교회가 `나누는 교회`로 전환하는 시발점이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마음한몸운동본부가 그동안 하느님의 이름으로 국내외에 전달한 지원금은 약 120억 원에 달한다. 두 행사는 국내 선교활동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추기경은 1990년대 들어 정치, 사회적 여건이 안정되자 교구 내실화에 부쩍 관심을 쏟았다. 양적성장 시대에서 질적성장 시대로 넘어가기 위해 도입한 것이 소공동체 운동이다. 추기경은 1992년 사목교서에서 `2000년대 복음화와 소공동체`를 장기 사목목표로 제시하고 소공동체 운동을 제창했는데, 이는 오랫동안 구상한 친교와 쇄신운동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다. 1992년 당시 서울대교구 본당들의 평균 신자 수는 7000명에 달했다.

 추기경은 교세 급성장에 따라 사목현장에서 나타나는 문제점, 즉 교회 대형화ㆍ소속감 약화ㆍ쉬는신자 증가ㆍ삶과 신앙의 유리 등을 해결할 수 있는 열쇠가 소공동체라는 통찰력을 갖고 있었다. 서울대교구에서 시작한 소공동체운동은 몇 년 만에 타교구로 확산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청소년 사목에 각별한 애정을 쏟은 점도 주목할만하다. 추기경은 거의 매년 교적 청소년(청년) 신자 수와 주일학교 등록 신자 수를 비교한 수치를 제시하며 사목 강화를 독려했다. 추기경은 교구 예산 편성시 "청소년은 교회의 미래가 아니라 현재다. 젊은이들을 잃어버리는 것은 널려 있는 보물을 잃어버리는 것이다"며 청소년 관련 지출만큼은 아끼지 않았다는 게 관계자들 전언이다. 본당 사목방문 때도 빠뜨리지 않고 점검하는 게 청소년 사목활동이었다.

가톨릭 종합미디어 시대 개막

 1988년 평화신문을 창간한 데 이어 평화방송 라디오(1990년)와 케이블 TV(1995년)를 잇달아 설립, 가톨릭 종합미디어 시대를 개막한 업적도 빼놓을 수 없다.

 추기경은 TV 방송국 설립 논의가 오갈 때 고민이 깊었다. 엄청난 초기 투자비 때문이다. 의견은 무성했지만 어차피 교구장이 결단을 내려야 할 사안이었다.

 마침내 그는 "21세기는 영상시대다. 매



가톨릭평화신문  2009-02-08

관련뉴스

말씀사탕2024. 5. 17

토빗 7장 17절
얘야, 용기를 내어라. 하늘의 주님께서 너의 그 슬픔 대신에 이제는 기쁨을 주실 것이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 QUICK MENU

  • 성경
  • 기도문
  • 소리주보

  • 카톨릭성가
  • 카톨릭대사전
  • 성무일도

  • 성경쓰기
  • 7성사
  • 가톨릭성인


GoodNews Copyright ⓒ 1998
천주교 서울대교구 · 가톨릭굿뉴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