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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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서막 열었던 역사적 현장에서 신앙의 연대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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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님 발자취를 따라서’ 순례단은 브뤼기에르 주교가 자신의 사목지인 조선에 입국하기 위해 거쳐 갔던 중국 대륙 곳곳을 순례하며 한국교회 신앙의 뿌리와 더불어 ‘신앙의 연대성’을 깊이 묵상할 수 있었다. 신앙이란 시간적, 공간적으로 과거와 현재가 연대하면서 시작되고 성장한다는 사실을 브뤼기에르 주교의 발자취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초대 조선대목구장으로 임명되기까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한국교회 첫 영세자 이승훈(베드로, 1756~1801)이 나오고, 브뤼기에르 주교가 끝내 살아서는 조선에 들어오지 못했지만 그의 유해가 지나갔던 중국 변문(邊門, 비엔먼)은 한국교회 역사를 논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상징적인 장소다. 순례단은 이승훈이 세례받았던 중국 북당(北堂), 변문을 찾아 브뤼기에르 주교가 초대 조선대목구장으로 임명되기 전후의 역사를 추적했다.




■ 북당에서 찾은 한국교회의 뿌리


순례단은 4월 16일 중국 베이징공항에 도착한 첫날 한국교회 첫 영세자 이승훈이 예수회 선교사 그라몽 신부에게 세례받은 북당을 찾았다. 순례단은 북당에 앞서 베이징의 대표적 천주교 유적 중 한 곳인 남당(南堂)을 먼저 방문했다. 이승훈도 1783년 말에 베이징에 간 뒤 남당에서도 천주교를 접했기 때문에 순례단은 남당 순례에 큰 의미를 두었다. 


그러나 방문 당시 남당은 보수 공사 중에 있어 성당 마당으로 통하는 출입문이 잠겨 있었다. 다행히 남당을 관리하는 중국인 신자가 한국 순례단을 배려해 외부 출입문을 열어 주면서 성당 마당까지는 들어갈 수 있었다. 성당 내부 공사 관계로 성당 안까지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웅장하고 아름다운 자태와 유구한 역사를 지닌 남당을 두 눈으로 본다는 사실만으로 순례단은 큰 감동을 받았다.


예수회 마테오 리치 신부가 1605년에 지은 남당은 1775년에 불탔다가 다음 해 다시 지어져 현존하는 중국 천주교 성당 가운데 가장 오래된 역사를 지니며, 중국을 방문하는 조선 사신들이 반드시 들르는 명소였다.


남당을 뒤로 하고 북당으로 향한 순례단은 이승훈이 세례받은 바로 그곳을 순례한다는 생각에 도착 전부터 일찌감치 감동을 느끼기 시작했다. 비록 1703년 12월 처음 봉헌된 북당이 19세기 후반, 천주교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당대의 권력자 서태후의 명으로 현재 위치로 이전했던 내력에서 이승훈이 세례받은 북당이 지금의 북당과 동일성이 있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순례단에게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장소와 외형은 달라졌을지라도 그 안에 담긴 상징적 역사성은 달라질 수 없기 때문이다.


순례단을 인솔한 원종현 신부(야고보·서울대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 부위원장)는 “이곳에서 우리 신앙의 뿌리와 연대성, 새 하늘과 새 땅의 의미를 찾자”고 말했다. 서울 순교자현양회 조화수(바오로) 회장 또한 “북당에 들어섰을 때, 이승훈이 세례받던 장면을 상상하면서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무한한 감격이 밀려왔다”고 밝혔다.


순례단이 북당 방문을 잊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는 평일에는 오전에만 미사가 봉헌되는 북당에서 오후 4시30분경부터 원 신부 주례로 미사를 봉헌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북당 공동체가 한국 순례단을 환대해 주었다. 


원 신부는 강론에서 “이승훈 베드로가 여기 북당에서 세례받은 뒤 조선으로 돌아가 서울 수표교 이벽(요한 세례자)의 집에서 신앙 공동체를 형성한 1784년이 한국교회 신앙 원년이 된다”며 “뿌리 없이 나오는 신앙은 없다”고 강조했다. 원 신부는 1784년 이승훈의 세례, 1831년 초대 조선대목구장으로 브뤼기에르 주교 임명, 1962년 한국교회에 정식 교계제도 성립이 서로 별개가 아닌 역사적 연속성에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순례단은 보편지향기도에서 브뤼기에르 주교가 하루라도 빨리 시복시성되기를 기원하고, 그의 강한 믿음을 본받겠다고 다짐했다.




미사 후 순례단은 제대 뒤쪽 공간에 설치돼 있는 복자 주문모(야고보) 신부,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 하느님의 종 이승훈의 유리화를 보며 또 한 번 시공을 초월한 신앙의 연대성을 발견하고 감격했다. 가톨릭 성직자로는 처음으로 1795년 1월 조선에 입국한 중국인 주문모 신부, 한국인 첫 사제 성 김대건 신부, 한국교회 첫 영세자 이승훈이 중국교회에서도 기념되고 있었다.


■ 초기 한국교회의 관문 ‘변문’


순례단이 한국교회사의 관문이며 통로인 변문을 찾은 것은 4월 20일 오전이었다.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단동(丹東, 단둥)과 북한 신의주로 이어지는 철길 옆에 위치한 변문 표지석이 순례단을 맞아 주었다. ‘변문진’(邊門鎭)이라 새겨진 표지석은 오랜 세월이 흘러 모서리가 마모돼 있었다. 옛 표지석 바로 가까이에는 중국 행정당국에서 최근에 큰 바위에 붉은 글씨로 변문진을 새겨 설치한 것으로 보이는 새 표지석도 볼 수 있었다.


순례단은 초창기 한국교회를 이끌어 갔던 인물들이 중국에서 조선으로, 조선에서 중국으로 목숨까지 걸고 변문으로 드나들었던 역사를 상기하며 변문 표지석을 쓰다듬고 안아 보았다. 이승훈이 변문을 거쳐 중국 북당에서 처음 세례를 받고 조선으로 돌아왔고, 주문모 신부가 변문을 지나 조선에 입국했다. 김대건, 최양업(토마스), 최방제(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1836년 12월 마카오 유학길을 떠날 때 변문을 지나갔고, 김대건은 1844년 12월 부제품을 받고 1845년 1월 변문에서 조선 신자들을 만나 한양에 들어왔다. 


가경자 최양업 신부도 1849년 4월 사제품을 받기 전후에 여러 차례 변문을 통한 조선 입국을 시도한 끝에 결국 조선에 들어와 신자들을 돌보다 ‘땀의 순교자’가 됐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1831년에 초대 조선대목구장으로 임명되는 과정에도 위험을 무릅쓰고 변문을 드나들며 조선의 신앙공동체 상황을 전했던 많은 조선 신자들의 노고가 바탕에 깔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순례단은 이번 순례에 동행한 한국천주교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 김기혁(요한 레오나르도) 순교자현양위원장으로부터 중국에서 변문으로 불리던 장소가 조선에서는 ‘책문’(柵門), 현지인들에게는 ‘가자문’(架子門)으로 불렸던 사실과 변문의 역사, 지리적 의미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이를 통해 변문이 교회사적으로는 물론 한국 근대사에서도 새 역사를 열어가는 장소였음을 다시금 알 수 있었다. 서울 순교자현양회 최만기(바오로) 부회장은 “한국교회 초창기 역사가 이뤄졌던 가장 중요한 장소 중 한 곳인 변문을 순례하며, 목숨까지 바쳤던 우리 신앙 선조들의 헌신에 큰 감사를 드렸다”고 말했다.


박지순 기자 beatles@catime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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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4-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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