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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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된 망상이라도 마음껏 꿈을 꾸는 세상이었으면…”

[김용은 수녀의 오늘도, 안녕하세요?] 53. ‘꿈’이 있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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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아이들이 행복한 꿈을 꾸며 살고 있을까? 대부분 직업을 말할 것이고, 무엇을 소유하고 싶다고 말하는 데 그칠지 모른다. OSV


“엄마, 그럼 내 꿈은 끝난 거야?”

한 아이가 낮은 성적표를 보고 실망한 엄마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이는 엄마가 만족할 만한 성적을 받아야 자신이 하고 싶은 ‘꿈’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시험을 잘 치러 높은 점수를 유지해야 남들이 좋다는 명문대를 갈 것이고, 그 대학을 나와야 ‘성공’했다고 할 직업을 가질 수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물론 최근 명문대 성공 공식이 무너져가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학벌이 중요한 사회를 살고 있다.

‘꿈’은 살아가는데 가장 커다란 에너지이며 원동력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꿈’은 ‘하고 싶은 것’이 아닌, ‘해야 하는 것’이 되었고 ‘좋아하는 것’이 아닌 ‘잘 해내야 하는 것’이며 이상이 아닌 무거운 현실이 되었다. 마음껏 상상하고 가슴이 뛰고 설레게 하는 꿈, 그리고 이루고 싶은 희망과 이상이 버려야 할 ‘허황된 망상’이 되어 버렸다. 당신의 ‘꿈’은? 이 질문에 신명나게 대답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나의 꿈은? 나는 꿈을 꾸며 살아왔을까? 현실의 무게가 너무 무겁고 취업이란 현실이 버거워서? 그렇기에 현실의 시스템이 요구하는 맞춤형 ‘인재’로 사느냐, 꿈은 그저 꿈일 뿐이라는 생각으로 너무도 일찌감치 꿈을 접고 살아온 것은 아니었을까?

살아갈 날이 너무도 많은 우리 아이들은 행복한 꿈을 꾸며 살고 있을까? 대부분 ‘직업’을 말할 것이고 ‘무엇’을 소유하고 싶다고 말할 것이다. 한때 나는 교육 현장에서 어린이와 청소년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인성 교육을 하면서 삶의 원동력이 되는 ‘꿈’을 갖게 해주고 싶어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계발해 실행했었다. 한번은 ‘꿈’이 무엇인지 그림으로 표현해보라고 했다. 초등학생 4학년이었을 것이다. 아주 예쁜 알알이 맺힌 잘 익은 포도송이를 그렸다. 과연 아이의 꿈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저는요. 이 포도알처럼 돈이 주렁주렁 열렸으면 좋겠어요.” 너무도 진지했고 또 절실해 보여서 잠시 할 말을 잃었던 기억이 있다. 그 어린 나이에 무엇이 이토록 간절하게 ‘돈’을 욕망하게 했을까?

미국의 교육학자이며 미디어 생태학자인 닐 포스트먼은 「교육의 종말」(The End of Education)을 통해 목적과 종말이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는 ‘END’에서 보여주듯 교육의 목적이 상실되면서 종말을 맞이했다고 신랄하게 비판한다. 학교 교육의 목적이 ‘삶’(life)이 아닌 ‘생계’(living)를 위한 ‘직업’이 돼버렸고, 경제적 가치와 효용주의라는 우상에 갇혀 ‘세속화’됐다는 것이다. 나와 이웃 그리고 세상과 함께 상호협력하면서 생명을 돌보는 책임감을 키우고, 사랑과 평화를 살도록 돕는 순수한 교육의 목적을 잃었다는 것이다. 결국 경쟁주의로 몰아넣고 절대 지식을 강조하면서 인성은 왜곡되어 교육의 종말이 도래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우리의 청춘들은 오늘도 꿈꿀 여유 없이 밤늦게까지 학원으로 내몰리고 시험 점수로 등급이 매겨지면서 주가지수처럼 희비가 오르락내리락하는 힘겨운 현실을 살아내고 있다. 경제적 가치로 ‘존재’에 레벨이란 등급을 매기면서 순수한 꿈을 잃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헛된 망상이라도 마음껏 꿈을 꾸는 그런 세상이었으면 좋겠다. ‘꿈 깨!’ ‘그럴 일은 없어!’라면서 현실의 무게로 아이들을 흔들어 깨우지 않으면 어떨까 싶다. 좋아하는 것에 대해 무한한 상상력을 키우면서 이상주의자로 살아갈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되는 그런 세상을 꿈꾸고 싶다. 나이가 들어도 내일모레 세상을 떠난다 해도 꿈을 꾸고 싶다. 완전한 사랑을. 진짜 평화를. 아름다운 소망을 현실로 이뤄내는 그런 세상을 꿈꾼다.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는 세상,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 젖먹이가 독사 굴 위에서 장난하며 젖 떨어진 아이가 살무사 굴에 손을 디밀어도”(이사 11,6-8)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세상을 마음껏 꿈꾸는 그런 세상을 꿈꾼다.



<영성이 묻는 안부>

요즘 언론에서 한동안 이슈가 된 교권침해의 핵심 원인을 ‘법과 제도의 한계’라고 말합니다. 물론 교권을 법으로 제도로 강요해서 억지로 보호할 수는 있겠지요. 그런데요. 사실 동물은 태어나면서부터 배우지 않아도 동물답게 살지요. 하지만 우리 인간은 인간답기 위해 교육을 받아야 하고, 존중받은 경험이 있어야 사람답게 살 수가 있지요. 인간 존중의 가치는 각자 존중받으면서 배우는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돈이나 부를 목표로 삼고, 나눔보다 소유하면서 기쁨을 느끼는 것에 익숙해진다면 당연히 탐욕이 따라오겠지요. 우리 아이들이 탐욕이 넘치는 사회에서 어떻게 인간 존중의 가치를 배울 수 있을까요? 법이 없어도 강요하지 않아도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며 살아가는 그런 세상을 꿈꾸는 어른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고 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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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4-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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