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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속 세계 공의회] <11> 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상)

갈등의 불씨 안고 있던 단성설, 점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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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경

 ◇단성설의 득세와 `일치령`

 451년 칼케돈 공의회가 확정한 `한 위격 안의 두 본성` 교리는 예수의 인간성을 강조한 나머지 하느님 예수와 인간 예수가 별도로 존재하는 것처럼 주장하는 네스토리우스주의와 그 반대로 예수의 신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인간 예수에게는 인성이 사라지고 신성만 있다고 주장하는 단성설이라는 양극단으로 치우신 두 이설 사이에 중도를 지킨 것이었습니다.

 다만 431년 에페소 공의회가 네스토리우스주의를 배격했다면 20년이 지난 451년 칼케돈 공의회는 단성설을 배격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습니다.

 사실 네스토리우스 자신은 하느님 예수와 인간 예수가 따로 있는 것처럼 주장한 적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하느님 예수와 인간 예수가 하나이고 같은 분임을 여러 차례 밝혔다고 합니다. 다만 인간성을 강조하다 보니 경쟁자인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치릴로에게 빌미를 주게 된 것입니다. 어쨌거나 에페소 공의회를 통해 네스토리우스는 쫓겨났고, 그의 추종자들은 페르시아에서 독자적으로 네스토리우스교를 세웁니다.

 반면 칼케돈 공의회에서 거부된 단성설의 경우는 또 달랐습니다. 당시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이집트 지역은 물론 시리아와 팔레스티나에서도 단성설이 득세하고 있었고, 공의회에서 단죄된 이후에도 사정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두 본성`이라는 칼케돈 공의회 선언에 대해 네스토리우스주의에 편향돼 있다면서 조직적으로 반발하는 움직임도 나타났습니다. 알렉산드리아에서는 가톨릭 총대주교가 살해되고 단성설파가 후임 총대주교에 선출되기도 합니다. 안티오키아 총대주교좌와 예루살렘 총대주교좌들도 단성설파가 차지하는 등 단성설파가 장악한 지역이 독자적 세력권을 형성합니다.

 한편 스페인과 갈리아(프랑스), 이탈리아 북부 등 서로마 제국 영토에는 이민족의 침입이 계속되고 마침내 서로마 제국은 476년에 멸망합니다. 로마는 동로마제국에 편입되고 이제 비잔틴이라고 부르는 동로마제국의 황제들은 단성설파가 주도하고 있는 이집트와 시리아 일대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게 됩니다. 그렇지 않아도 동쪽에서 페르시아 세력이 호시탐탐 제국을 엿보고 있는데 단성설파가 장악하고 있는 이집트와 시리아가 떨어져 나가면 제국의 평화와 안녕에 큰 문제가 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황제들은 단성설파와 화해를 모색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뜻밖의 사건이 터집니다. 이른바 `헤노티콘` 또는 일치령 사건입니다. 헤노티콘(henotikon)은 `일치`를 뜻하는 그리스 말입니다. 동로마제국 황제 제논(재위 474~491)은 가톨릭 주교들과 단성설파의 일치와 화합을 도모하는 한 가지 방법으로, 양측이 다 받아들일 수 있는 법령을 482년에 발표합니다.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채택한 신조만을 신앙규범의 유일한 척도로 내세우면서 그 밖의 신조들은 필요없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이 법령이 바로 `헤노티콘` 곧 일치령이었습니다.

 황제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아카키우스를 설득했고, 아카키우스 총대주교는 이 헤노티콘을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양측이 다 수용할 것이라고 생각한 황제의 기대와는 달리, 가톨릭 주교들도 단성설파들도 이 일치령에 불만을 표시합니다. 게다가 황제는 로마 주교인 교황과는 이 문제를 협의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교황 펠릭스 3세는 이 헤노티콘을 수용한 아카키우스 총대주교를 파문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중심으로 하는 동방 교회와 교류를 단절해 버립니다. 이렇게 단절된 동ㆍ서방 교회 관계는 황제 유스티누스 1세 때인 518년에 가서야 다시 회복됩니다.
 
 ◇삼장서 논쟁

 유스티누스 1세의 후임 황제인 유스티니아누스 1세(재위 527~565)는 이민족의 침입으로 멸망해 버린 서로마 제국의 옛 영토를 회복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북아프리카와 스페인 일부, 이탈리아도 되찾았습니다. 이제 제국의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집트와 시리아서 큰 세력을 갖고 있는 단성설파의 신임을 얻는 것이 절실히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황제는 단성설파에 기울어 있는 황후 테오도라의 도움으로 단성설파의 호감을 살 수 있는 한 가지 조치를 취합니다. 그것은 이른바 `삼장서`에 대한 단죄였습니다. 삼장서(三章書)란 친 네스토리우스 경향을 가진 세 학자들의 저작을 가리키는 표현인데, 네스토리우스의 스승인 몹수에스티아 주교 테오도루스(350?~428), 네스토리우스의 추종자 혹은 친구들인 키루스 주교 테오도레투스(393?~457?)와 에데사 주교 이바스(?~457)가 그들이었습니다.

 황제는 543년 칙령을 발표해 1)몹수에스티아 주교 테오도루스와 그의 저작들 2)키루스 주교 테오도레투스의 일부 저술 3)에데사 주교 이바스가 페르시아의 네스토리우스파 총대주교 마리스에게 보낸 서한을 단죄했습니다.

 황제는 단성설파의 호감을 사려고 그 반대파에 속하는 이 세 사람을 단죄했지만, 그들은 이미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난 이들이었습니다. 테오도루스 주교는 네스토리우스를 단죄한 에페소 공의회가 개최되기 전에 이미 사망한 상태였고, 키루스 주교 테오도레투스와 에데사 주교 이바스 역시 사망한 지 거의 100년이 됐을 뿐 아니라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복권된 이들이었습니다. 황제는 무리수를 둔 셈이었는데 대다수 동방 주교들이 이 무리수에 동의한 것입니다.

 그러나 교황 비질리오(재위 537~555)는 처음에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미운털이 박힌 교황은 급기야는 황제가 있는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강제로 억류됩니다. 547년 1월쯤이었습니다. 압력을 견디지 못한 교황은 548년 `판결문`을 발표, 삼장서 단죄에 동의합니다.

 교황의 이런 조치에 이제는 서방 교회가 크게 반발합니다. 당황한 교황은 단죄 조치를 철회하고 황제에게 공의회를 열어서 문제를 해결하자고 요청하지만 황제는 551년에 삼장서를 다시 단죄하는 새로운 칙령을 발표하는 등 더욱 강경한 조치를 취합니다. 이를 거부한 비질리오 교황은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위험한 상태에 내몰리게 되기까지 합니다.

 그러는 사이에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가 된 에우티키우스는 교황에게 공의회를 소집해 문제를 다시 원점에서 논의할 것을 요청합니다. 이 요청을 받아들인 교황은 서방 주교들도 참석할 수 있도록 이탈리아 반도나 시칠리아 섬에서 공의회를 열 것을 황제에게 제안합니다. 이에 대해 황제는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 다섯개 총대주교좌에서 각각 동등한 수의 대표 주교들이 참석하는 공의회를 주장하지요.

 결국 공의회는 황제 뜻대로 비잔틴제국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553년에 열리게 됩니다. 개최 장소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지은 하기아 소피아(`하느님의 지혜`라는 뜻) 성당이었습니다.

이창훈 기자 changhl@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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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1-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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