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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속 세계공의회] <13> 제3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상)

단의설 퍼지면서 끊임없는 갈등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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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의설로 시끄러웠던 7세기 초중반 교황들.
왼쪽부터 호노리오 1세(재위 625~638)ㆍ세베리노(640)ㆍ요한 4세(640~642)ㆍ테오도로 1세(재위 642~649) 교황.
 

 ◇단의설의 득세와 교황 호노리오 1세
 451년 칼케돈 공의회가 `한 위격(인격) 안의 두 본성` 교리를 통해 단성설을 배격한 이후 단성설이 득세하던 이집트와 시리아 등지에서는 단성설파의 독자적 세력이 형성됩니다. 이 단성설파를 끌어들여 제국의 안정을 도모하고자 동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재위 527~565)는 543년 단성설과 반대 경향인 친 네스토리우스파 주교들과 그 저작들인 `삼장서`(三章書)를 단죄했지요. 이로 인해 불거진 문제를 다루고자 소집된 공의회가 지난호에서 살펴본 것처럼 다섯 번째 세계공의회인 553년 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였습니다.
 그런데 한 세기쯤 지나서 단성설파와 화합을 모색하려는 또 다른 시도가 나타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단 하나의 의지와 하나의 활동 원리만 있다는 단의설(單意說, monotheletism) 또는 단활설(單活說, monoenergism)이라는 이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이설은 사실 단성설에 뿌리를 두고 있었습니다. 신성이 인성을 흡수해 버려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신성만 남아 있다는 것이 단성설인데, 이를 예수 그리스도의 의지에 적용해 신적 의지와 인간적 의지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결합하면서 신적 의지 하나만 남아 있다는 주장이 단의설이기 때문입니다.
 이 단의설 또는 단활설을 처음 내세운 사람은 6세기 초에 안티오키아 총대주교를 지낸 세베루스(재임 512~538)였습니다. 그러나 단의설이 새롭게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거의 1세기가 지나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세르기우스 때였습니다. 그리스도에게는 신성과 인성이 다 존재함을 인정하면서도 의지와 관련해서는 신적 의지 하나뿐이라는 단의설을 주장한 세르기우스는 당시 동로마 황제 헤라클리우스(재위 610~641)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헤라클리우스 황제는 한때 페르시아에 빼앗겼던 이집트와 시리아 지역을 재탈환하면서 이 지역 주류 세력인 단성설파를 끌여들여 제국의 안정을 꾀하고자 했는데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이자 단성설과 비슷한 단의설 주창자인 세르기우스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이때 키루스라는 주교가 있었습니다. 그는 황제가 단성설파와 화합하는 것에 대해 칼케돈 공의회의 가르침과 맞지 않는다고 반발하다가 세르기우스가 제시하는 단의설 교리에 넘어갑니다.
 마침내 황제와 세르기우스의 도움으로 631년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가 된 키루스는 633년 이집트 전지역에서 단성설파와 일치를 선언하는 일치령을 발표합니다. 단성설파가 반대하는 것은 네스토리우스파였지 자기들과 비슷한 단의설을 주장하는 이들이 아니었기에 일치 선언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일치령이 발표되자 단의설 주창자인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세르기우스는 적극 환영합니다. 나아가 그는 `그리스도에게서는 하나의 의지와 하나의 행동만이 존재한다`는 내용의 교리 설명서까지 발표합니다.
 그런데 강력한 반대자가 등장합니다. 수도승 출신으로 당시 예루살렘 총대주교가 된 소프로니우스였습니다. 그는 세르기우스의 단의설이 `두 본성 안의 한 위격` 교리를 확정한 칼케돈 공의회 가르침과 위배된다며 세르기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이 목자의 탈을 쓴 늑대라고 강력히 규탄합니다.
 뜻밖의 적수를 만나자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세르기우스는 교황 호노리오 1세(재위 625~638)에게 그럴듯한 말로 상황을 무마하면서 논쟁으로 평화를 깨지 말고 전통 가르침을 지키기로 했다는 요지의 편지를 써 보내고는 교황의 의견을 구합니다.
 첨예한 신학적 논쟁에 대해 잘 알지 못했던 호노리오 1세 교황은 세르기우스에게 보내는 개인 서한에서 이 논쟁이 말놀이에서 비롯했다면서 불화를 일으킬 수 있는 표현을 삼가할 것을 당부합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교황은 서한에서 `그리스도에게는 하나의 의지만 있다`고 밝힘으로써 단의설을 수용한 것입니다.
 칼케돈 공의회에서 선언한 `한 위격 두 본성` 교리에 따르자면, 의지와 관련해서도 그리스도에게는 신적 의지와 인간적 의지가 온전히 다 있어야 하는 것이 정론인데, 교황 자신이 이와 다른 주장을 하고 만 것입니다.
 어쨌거나 교황 편지에서 힘을 얻은 세르기우스는 단의설을 더 내세우며 단성설파와 타협을 시도하고 황제는 세르기우스의 도움으로 638년 `신앙고백(Echtesis)` 칙령을 발표해 `그리스도 안에는 오직 하나의 의지만이 있다`는 단일설을 제국의 법으로 선포합니다. 하지만 이 주장에 반발했어야 할 소프로니우스는 단일설이 발표되기 전에 세상을 떠납니다. 교황 호노리오 1세도 그해 10월 12일에 선종하지요. 주동자인 세르기우스 총대주교는 교회회의를 통해 이 칙령을 승인하고는 역시 그해 12월에 세상을 떠납니다.
 
 ◇단의설에 대한 서방 교회의 반발
 황제가 영향력을 행사하던 동방 교회에서는 주교들이 대부분 이 새로운 신앙고백에 서명합니다. 하지만 로마 주교인 교황을 중심으로 하는 서방 교회는 상황이 달랐습니다. 호노리오 1세가 선종한 후 후임 교황이 된 세베리노는 그리스도 안에는 두 본성이 있으며 마찬가지로 두 의지와 두 활동(원리)이 있다고 선언하면서 황제가 발표한 신앙고백 칙령을 단죄해 버립니다. 그러나 세베리노 교황은 교황직에 오른 지 불과 4개월 만인 640년 12월에 선종합니다.
 세베리노 교황 후임인 요한 4세(재위 640~642) 교황은 교회회의를 열어 그리스도에게 하나의 의지만 있다는 신앙고백 칙령을 이단으로 단죄합니다. 그리고는 그 결정을 황제에게 보내지요. 헤라클리우스 황제는 자신이 `신앙고백` 칙령의 저자가 아니라면서 그러나 자신이 그 칙령에 서명했고, 그 칙령이 많은 문제를 야기했음을 인정합니다. 그게 황제로서 한 마지막 행위였습니다. 헤라클리우스 황제는 641년 사망합니다.
 요한 4세 후임으로 교황이 된 테오도로 1세(재위 642~649) 역시 단의설을 단죄하면서 단의설을 지지하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도 단죄합니다. 이렇게 교황들이 계속해서 단의설을 단죄하고 나서자 641년 동로마 황제에 오른 콘스탄스 2세는 648년 10년 전 헤라클리우스 황제가 발표한 `신앙고백` 칙령을 폐지하고, 앞으로는 교황을 비롯해 어느 누구도 신학적 문제, 특히 그리스도의 본성과 의지에 관한 문제들에 대해 쟁론을 벌이지 못하도록 하는 금지령을 발표합니다. 하지만 이 칙령은 오히려 혼란을 더 부추길 뿐이었습니다.
이창훈 기자 changhl@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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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1-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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