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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속 세계 공의회] <14>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680~681년)(하)

갈등의 마침표, 정통교리 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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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소집 당시 교황이었던 성 아가토(재위 678~681, 왼쪽) 교황과 공의회 결과를 추인한 성 레오 2세(재위 682~683) 교황.

배경

 ◇성 마르티노 1세 교황과 고백자 성 막시모
 이런 상황에서 서방 교회에 새 인물이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테오도로 1세 후임인 교황 마르티노 1세(재위 649~655)였습니다. 마르티노 1세는 교황으로 선출되자마자 두 가지 중대한 조치를 취합니다.
 첫째는 황제의 승인을 받지 않고 바로 교황좌에 착좌한 것입니다. 비잔틴(동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재위 527~565) 때부터 로마 주교는 황제 승인을 받아야만 교황으로 축성될 수 있었는데 마르티노 1세는 이 관행을 과감하게 깨뜨린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교황궁인 로마 라테라노에서 로마 공의회를 열어 단의설 주창자들과 헤라클리우스 황제가 638년에 선포한 `신앙고백` 칙령을 단죄한 것입니다. 이에 따라 단의설을 주장한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키루스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세르기우스는 물론 세르기우스의 후임 총대주교들인 페트루스와 피루스까지 단죄받았습니다.
 라테라노 공의회에서 큰 역할을 한 신학자가 고백자 성 막시모(580~662)였습니다. 한때 헤라클리우스 황제 비서를 지냈던 그는 수도자로 살면서 단의설을 배격하고 칼케돈 공의회 가르침에 따른 정통 교리를 수호했습니다. 마르티노 1세 교황은 그를 라테라노 공의회에 참석시켜 단의설의 이설을 배격토록 했습니다.
 하지만 이로 인해 마르티노 1세와 막시모 성인은 헤라클리우스 황제 후임인 콘스탄스 2세 황제에게서 미움을 받습니다. 대역죄인으로 몰린 두 사람은 6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이송돼 재판을 받습니다. 교황은 흑해 크림반도로 유배돼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지요. 동ㆍ서방 교회는 공히 그를 순교 성인으로 공경합니다. 막시모 성인 역시 재판에 회부돼 발칸반도 남동부 트라키아로 유배됩니다. 나중에는 혀와 오른손마저 절단 당한 채 흑해 연안으로 다시 추방돼 지내다가 662년에 생을 마칩니다.
 
 공의회 소집과 과정
 단의설을 둘러싼 교리 싸움은 동로마 제국 황제 콘스탄티누스 4세(재위 668~685) 때 새로운 해결의 실마리를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때쯤에 와서는 제국 영토였던 이집트와 시리아가 다시 아랍인들 손에 넘어가 버린 상태였습니다. 단의설이 공식적으로 제기된 것이 이집트와 시리아의 단성설파와 손을 잡기 위해서였는데 아랍인들이 이 지역을 점령해 버렸으니 의미가 없어진 셈이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 4세는 678년 로마 교황 성 아가토(재위 678~681)에게 서한을 보내 동ㆍ서방 상호 이해를 위한 공의회 개최를 제안합니다. 이를 받아들인 교황은 먼저 680년에 로마에서 시노드를 열어 그리스도 안에서는 신적 의지와 인간적 의지 두 의지가 있다는 교리를 확인하고 그 결정사항을 특사 편에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냅니다.
 마침내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가 680년 11월 7일 황제궁 둥근 천장이 있는 대회의실에서 개막했습니다. 공의회에 참석한 주교는 전체적으로는 174명이었지만 개막 첫 회의에는 50명 정도밖에 참석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교황 특사로는 주교 3명과 사제 2명, 부제 1명 등이 참석했습니다.
 공의회는 681년 9월 16일까지 꽤 오랜 기간 열렸고, 모두 18차 회의가 진행됐습니다. 황제가 직접 참석한 회의는 마지막 회의까지 합하면 모두 12차례나 됐습니다. 아가토 교황이 쓴 긴 교리 서한과 680년 로마 시노드에서 결정한 사항들이 회의 전반부에 낭독됐습니다. 18차에 이르는 회의의 많은 부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의지가 하나인지 둘인지, 활동(원리)이 하나인지 둘인지에 대해 성경과 교부들의 가르침을 검토하는 데 할애했습니다.
 단의설을 주장하던 안티오키아 총대주교 마카리우스를 비롯해 그의 지지자들은 준비한 성명을 읽고 자신들 입장을 변호했습니다. 이어 마카리우스에 대한 소송이 시작됐습니다. 성경과 교부들의 저작을 잘못 적용하고 멋대로 인용했다는 비판을 받은 안티오키아 총대주교 마카리우스는 총대주교직을 박탈당합니다.
 교부들은 또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세리기우스가 교황 호노리오 1세에게 보낸 편지 등을 검토한 후 세리기우스를 비롯해 그 후임 총대주교들인 피루스, 파울루스, 페트루스 등과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를 지낸 키루스 등 단의설 추종자들을 모두 단죄합니다.
 여기까지는 교황 아가토가 제시한 공의회 방향과 크게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교부들은 또 아가토 교황이 언급하지 않은 선임 교황 호노리오 1세에 대한 문제를 논의하고 그를 단의설 추종자들과 함께 단죄합니다. 교황 특사들은 이에 대해 아무런 항의도 하지 않았습니다.
 681년 9월 11일에 열린 제17차 회의에서 교부들은 공의회의 신앙고백문(신조)를 작성합니다. "우리는 거룩한 교부들의 가르침에 따라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두 개의 본성적 의지와 두 개의 본성적 활동(양식)이 나뉘지도 바뀌지도 갈리지도 섞이지도 않으며, 사악한 이단자들의 말과 달리 이 두 본성적 의지들이 반대되지도 않는다고 선언한다."
 681년 9월 16일 이 신조가 표결을 통과했고, 참석 주교 174명이 서명을 합니다. 콘스탄티누스 4세 황제도 승인합니다. 이로써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가 끝났습니다.
 
 공의회 결과와 평가
 그 사이에 아가토 교황은 선종하고 후임 교황직에는 레오 2세(재위 682~683)가 즉위합니다. 레오 2세는 683년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결정을 추인합니다. 이로써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는 여섯 번째 세계공의회로서 단의설뿐 아니라 호노리오 1세 교황까지도 단죄한 공의회로 역사에 기록됩니다.
 레오 2세 교황은 `그리스도에게는 신적 의지만 있다`며 단의설의 이설을 수용한 호노리오 1세 교황에 대해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가르침을 충실히 제시해야 할 교황 직무를 소홀히 했다고 비판합니다.
 호노리오 1세 교황의 단죄는 이후 교황 무류성과 관련해서 자주 논쟁거리가 됐습니다. 교황 무류성이란 교황이 공식으로 선언한 가르



가톨릭평화신문  2011-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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