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30일
사목/복음/말씀
전체기사 지난 연재 기사
[교회사 속 세계 공의회] <15> 제2차 니케아 공의회(787년)<상>

"성화상 공경" 논쟁 불식시키려

폰트 작게 폰트 크게 인쇄 공유


 
▲ 시나이산 성녀 가타리나 수도원에 소장돼 있는 6세기 작품 성 베드로 성화상.
 

배경
 787년에 개최된 제2차 니케아 공의회는 이른바 `성화상 논쟁`을 종식시키고자 소집된 공의회였습니다. `성화상`이란 하느님이나 그리스도, 마리아, 성인들과 천사 등 거룩한 이들의 모습을 그림이나 판화, 모자이크, 조각 등으로 형상화한 작품을 말합니다.
 박해 시기에 신자들은 물고기, 양, 새, 닻, 배, 어부, 목자 같은 다양한 상징들로 자신들의 신앙을 표현했습니다. 오늘날 로마에 가면 옛 로마시대 지하 공동묘지(카타콤베)에서 이런 것들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박해가 끝나고 신앙의 자유를 얻고 난 후에도 이런 상징들은 그리스도교의 신비와 신앙을 일깨우는 역할을 했지요. 그러나 세례자들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이런 상징들만으로는 그리스도교 신앙과 신비를 제대로 설명하기가 쉽지 않아 좀 더 분명한 표현이 필요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 모습, 성모 마리아와 사도들 모습, 성인들 모습을 담은 성화상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성당 벽에 걸리거나 그려진 성화상들은 장식물로서뿐 아니라 교육적 기능을 수행하는 도구로도 활용됐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특히 5세기에 와서 성화상은 일반 대중 사이에서 공경 대상이 되기 시작합니다. 신자들은 성화상에 입을 맞추고, 향을 드리는 등 공경의 예를 표시했으며, 등불이나 촛불을 그 앞에 켜놓고 무릎을 꿇어 기도하는 등 성화상 공경이 대중신심으로 확산됩니다. 이런 성화상 공경은 서방 교회보다는 동방 교회에서 더 유행했는데, 수도자들이 아름다운 성화상을 만들어 활용하면서 수도원은 성화상 문화의 중심 역할을 했습니다. 서방에서는 성화상보다는 성인들 유물을 공경하는 관습이 더 많았습니다.
 물론 성화상 공경을 반대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주된 반대 이유는 어떤 형상으로도 우상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구약성경의 금령(탈출 20,4; 레위 26,1)에 위배된다고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동방에서는 성화상 공경이 대중신심으로 확산되면서 동시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커졌습니다. 구약성경에서 금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네스토리우스주의 이설에 대한 우려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인간으로 그려진다면, 신성보다도 인성만을 강조한 네스토리우스주의를 용인하는 것이 된다고 본 것입니다. 게다가 7세기 중반 이래로 그리스도교 세계에 영향을 미친 이슬람 역시 구약성경을 근거로 형상을 만드는 것을 철저히 금했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하면서 특히 소아시아(오늘날의 터키) 지역 주교들이 성화상 금지에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여기에 도화선 역할을 한 인물이 비잔틴(동로마제국) 황제 레오 3세(재위 717~741)였습니다. 무슬림에게 빼앗겼던 수도를 되찾고 제국에서 이슬람 세력을 격퇴한 뛰어난 황제였던 그는 성화상 공경을 우상숭배 혹은 미신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리하여 교회를 개혁하고 제국을 강화하는 일환으로 726년쯤에 성화상 공경을 금하는 칙서를 발표하고는 콘스탄티노폴리스 황궁문에 걸려 있던 예수 그리스도 초상을 제거해 버렸습니다. 군중이 항의하며 폭동을 일으키자 황제는 강제로 진압해 더러는 죽이고 더러는 체포해 징벌을 가했습니다.
 당시 교황은 그레고리오 2세(재위 713~731)였습니다. 황제는 교황에게 서한을 보내 성화상 공경을 금하는 자신의 새 정책을 승인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교황은 승인해 주지 않으면 로마로 쳐들어가 체포하겠다는 황제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구약의 우상숭배와 성화상 공경이 다르다며 그 요청을 거부했습니다.
 하지만 레오 3세 황제는 731년 1월 17일 원로원을 비롯해 국가 주요 공직자들 그리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게르마누스를 불러다 놓고 성화상을 소유하거나 성화상에 공경을 표하는 행위를 금지하면서 이를 위반하는 자를 국가 반역자로 여긴다는 칙령을 총대주교 이름으로 발표할 것을 지시합니다. 성화상 공경이 우상숭배가 아니라는 점을 이미 밝힌 바 있는 총대주교가 이를 거부하자 황제는 총대주교를 내쫓고 측근을 후임에 앉혀 칙령을 발표토록 합니다. 이로써 황제는 교회 이름으로 성화상 공경 금지를 정당화한 것이지요. 이에 따라 성화상 파괴 행위가 무섭게 자행되고, 항의하는 이들에게는 가혹한 탄압이 이어집니다.
 교황 그레고리오 2세 후임인 교황 그레오리오 3세(재위 731~741)는 황제의 이런 성화상 금지 조치에 맞서 로마에서 교회회의를 소집해 성화상 파괴자들을 파문하겠다고 경고합니다. 그러나 교황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성화상 파괴 운동은 계속되고 레오 3세 황제의 아들 콘스탄티누스 5세(재위 741~775) 때에 이르러 더 한층 격화됩니다.
 그는 754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인근 보스포로스 해협 해안 히에레이아에 있는 황실 궁전에서 주교 338명이 참석하는 교회회의를 엽니다. 로마 주교인 교황은 초청을 받지도 않았습니다. 또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좌는 공석이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오키아, 예루살렘 총대주교들도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공식성 혹은 대표성이 없는 회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회의에서는 성화상 공경을 우상숭배로 규정합니다. 그리고는 대중들의 성화상 신심에 깊은 관련이 있었던 수도자들을 우선적으로 박해하고 수도원들을 폐쇄시킵니다.
 이렇게 해서 거세게 계속되던 성화상 파괴 운동은 콘스탄티누스 5세의 아들 레오 4세(재위 775~780)가 비잔틴 황제가 되면서 주춤해집니다. 레오 4세의 아내 이레네 황후가 신심 깊은 성화상 공경자여서 그 영향 때문이라고 합니다.
 레오 4세가 죽고 10살 된 아들 콘스탄티누스 6세(재위 780~797)가 제위에 오르자 아들을 대신해 섭정을 펼친 황후 이레네는 성화상 파괴 논쟁을 종식시키고 성화상 공경의 옛 전통을 확인하는 세계공의회를 열기로 합니다. 황후는 아들 콘스탄티누스 6세와 함께 로마 교황 하드리아노 1세(재위 772~795)에게 이를 알리고 초청하는 편지를 보내지요. 교황은 여기에 동의하고 사절들을 파견하겠다고 답변합니다.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였던 바오로 4세는 원래 성화상 파괴주의자였지만 갑자기 총대주교직을 사임하는 바람에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좌가 공석이 돼 버렸습니다. 이레네 황후의 비서로 평신도였던 타라시우스가 주교로 축성돼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가 됩니다. 784년 말쯤이었습니다.
 타라시우스 총대주교는 마침내 786년 8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는 사도들의 성당에서 공의회를 개최합니다. 그러나 성화상 파괴를 지지하던 군인들이 난입해 공의회를 해산시켜 버립니다. 이레네 황후의 개입으로 사태가 수습되고 마침내 이듬해인 787년 9월 24일 니케아에서 공의회가 열립니다. 이 공의회가 일곱 번째 세계공의회인 제2차 니케아 공의회입니다. 이창훈 기자 changhl@pbc.co.kr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11-06-19

관련뉴스

말씀사탕2024. 4. 30

시편 33장 18절
주님의 눈은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당신 자애를 바라는 이들에게 머무르시도다.
  • QUICK MENU

  • 성경
  • 기도문
  • 소리주보

  • 카톨릭성가
  • 카톨릭대사전
  • 성무일도

  • 성경쓰기
  • 7성사
  • 가톨릭성인


GoodNews Copyright ⓒ 1998
천주교 서울대교구 · 가톨릭굿뉴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