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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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속 세계 공의회] <17>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869~870)<상>

로마 교황 수위권 굳건히 지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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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소집의 발단이 된 포티우스 이교 사던 당시의 교황 성 니콜라오 1세(왼쪽)와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를 소집한 당시의 교황 하드리아노 2세.

배경


 여덟 번째 세계 공의회인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포티우스가 로마 교황의 수위권을 부인하고 니콜라오 1세를 파문한 이른바 `포티우스 이교(離敎)` 사건을 다루고자 소집된 공의회였습니다.
 9세기 중엽 비잔틴 제국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에는 이냐티우스(Ignatius, 799~877)라는 뛰어난 대주교가 있었습니다. 그는 비잔틴 황제가 된 미카엘 1세(재위 811~813)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미카엘 1세를 내쫓고 황제 자리를 차지한 레오 5세(재위 813~820)는 이냐티우스를 거세시키고 수도원에 가뒀습니다. 이냐티우스가 미카엘 1세의 후계자로 황제직을 주장하지 못하도록 하고자 내린 조처였습니다. 그런데 이냐티우스는 자진해서 수도생활을 시작합니다. 시간이 흘러 그는 수도원장이 되고 나중에는 주교까지 됩니다.
 다시 시간이 흘러 비잔틴 황제 테오필루스(재위 829~842)에 이어 그 아들 미카엘 3세(재위 842~867)가 황제 자리에 오르지만 겨우 3살인 어린 아들을 위해 황후 테오도라가 섭정을 펼칩니다. 때마침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좌가 공석이 되자 이냐티우스 주교는 테오도라 황후의 호의에 힘입어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가 되지요. 847년이었습니다.
 미카엘 3세 황제는 성장하면서 천하의 난봉꾼이 됩니다. 어머니 테오도라 황후의 간섭이 심해지자 그는 외삼촌 바르다스와 결탁해 어머니를 수도원에 들어가도록 해달라고 이냐티우스 총대주교에게 요청합니다만 단호하게 거절당합니다. 아들과 분란이 일어나는 것을 피하고자 테오도라 황후는 자진해서 물러나지요. 그 자리는 황후의 동생 바르다스가 차지합니다. 바르다스는 아내와 이혼하고 며느리와 동거할 정도로 조카 황제 미카엘 3세 뺨치는 인물이었고, 또 그로 인해 이냐티우스 총대주교에게 호된 질책을 받았습니다.
 황제와 그 외삼촌 바르다스에게 미운털이 박힌 이냐티우스 총대주교는 결국 총대주교직에서 쫓겨나고 그 자리는 황제의 제1서기였던 포티우스(815?~897)가 차지합니다. 857년 성탄 때였습니다 포티우스는 신학ㆍ문학ㆍ의학ㆍ철학ㆍ수사학ㆍ법학 등 모든 분야에서 뛰어난 천재적 인물이었지만 평신도 신분이었습니다. 그래서 포티우스는 독서직을 시작으로 총대주교직에 필요한 성품을 불과 6일 만에 다 받고 총대주교좌에 올랐다고 합니다. 그에게 성품을 준 주교는 파문당한 주교였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측근을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에 앉힌 황제는 교황의 환심을 사고자 포티우스를 승인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 당시 교황은 성 니콜라오 1세(재위 858~867)였습니다. 그는 황제들의 간섭에서부터 교회의 독자성을 확립하고 문란한 교회 질서와 기강을 바로잡으며 교황권을 강화하기 위해 힘을 쏟은 중세기의 뛰어난 교황이었습니다.
 니콜라오 1세는 사절들을 파견해 자초지종을 알아보게 합니다. 그렇지만 사절들은 황실을 등에 업은 포티우스의 뛰어난 언변과 지략에 속아 넘어갑니다. 그래서 861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교황 사절들이 주재한 교회회의에서는 이냐티우스 해임과 포티우스의 총대주교 취임을 승인합니다.
 하지만 이냐티우스 총대주교 측으로부터도 보고를 전해들은 교황은 이 회의를 승인하지 않고 오히려 863년 로마에서 교회회의를 열어 포티우스를 파문하고 이냐티우스의 복직을 결정합니다. 아울러 동방의 다른 총대주교좌들에게서 서한을 보내 포티우스를 승인하지 말 것을 요청하지요. 교황의 이런 조치에 포티우스가 반발하리라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이 시기에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합니다. 당시 불가리아 왕 보리스가 비잔틴 황제를 대부로 삼아 신자가 됐는데 이를 계기로 동방 교회의 많은 선교사들이 불가리아로 파견돼 복음을 전합니다. 그런데 보리스 왕은 사절단을 로마로 파견해 교회 교리와 규율에 대한 가르침을 받고자 했습니다. 니콜라오 1세 교황은 이에 대한 답신을 보냈는데 이를 동방 교회의 관할권에 대한 로마의 침해라고 여긴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가 발끈한 것입니다.
 이윽고 포티우스는 동방 주교들에게 칙서를 보내 로마를 대표로 하는 서방 교회의 문제점들을 지적하면서 교황과 서방 주교들을 뭉뚱그려 단죄합니다. 포티우스는 특히 서방 교회에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에 없는 `성자에게서`를 신경에 포함시키고 있다고 비난하고는 빠른 시일 안에 교회회의를 소집해 이런 문제들을 논의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와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 교회들이 공동선언을 발표하자고 제안합니다.
 이에 따라 마침내 867년 여름에 많은 주교들이 참석한 가운데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교회회의가 열리고 참석 주교들은 서방 교회의 교리와 규율들에 문제가 있다고 공격합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로마와 서방 교회가 △사제들의 결혼을 허용하지 않으며 △사제들에게 견진성사 집전권을 허락하지 않으며 △신경에 `(~와) 성자에게서`(필리오케, filioque)라는 문구를 멋대로 집어넣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특별히 주목할 것은 `필리오케`에 관한 부분입니다. 381년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확정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에는 "성령께서는 성부에게서 발하시고"라고만 돼 있었습니다. 이 신경을 풀어 쓴 또 다른 신경 중 하나인 `아타나시오 신경`에는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하시고"라고 `(와) 성자에게서`가 첨부돼 있었습니다. 이 신경이 널리 소개되면서 589년 스페인 톨레도에서 개최된 2차 톨레도 지역 공의회에서는 이를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에 공식적으로 첨가하고 이후 서방교회에서는 이를 널리 사용해 왔습니다. 포티우스는 이 점을 지적한 것입니다.
 결국 포티우스가 주도한 교회회의는 교황 수위권을 부정하면서 교황 니콜라오 1세를 파문합니다. 이것이 이른바 포티우스 이교(離敎) 사건, 곧 포티우스가 보편 교회로부터 떨어져 나간 사건입니다. (물론 이것은 서방 교회 곧 로마 가톨릭교회 측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상황이 급변했습니다. 그해 가을 포티우스가 쫓



가톨릭평화신문  2011-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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