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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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속 세계 공의회] <19> 제1천년기 세계 공의회 종합

그리스도교 신앙 핵심 세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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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까지 그리스도교 첫 천년기에 열렸던 8차례의 세계 공의회에 대해 살펴봤습니다. 두 번째 천년기에 열린 세계 공의회들을 계속 더 탐구하기에 앞서 첫 번째 천년기에 열린 세계 공의회의 몇 가지 특징을 정리하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첫 천년기에 열린 세계 공의회들을 흔히 `제국 공의회`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공의회 개최에 황제가 주도적으로 개입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황제는 공의회를 소집하고 개최 장소를 결정했을 뿐 아니라 때로는 개막 연설에 이어 토론까지 했습니다. 또 공의회 결정 사항에 서명했고 이를 제국의 법으로 공포했지요.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신앙의 자유를 얻은 후 그리스도교가 급격히 확산되고 국교가 되면서 제국 교회가 됐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교리 문제로든 아니면 교회 규율 문제로든 그로 인해 교회가 분열되면 그것은 또한 제국의 정치적 안정에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니케아, 에페소, 칼케돈, 콘스탄티노폴리스. 제1천년기 세계 공의회 개최 장소들입니다. 모두가 동방 교회 지역입니다. 이 또한 이 시기 세계 공의회들이 `제국 공의회`였다는 사실과 무관치 않습니다. 그런데 8차례 세계 공의회를 살펴보면서 확인했듯이 이 공의회들에 참석한 주교들은 압도적 다수가 동방 주교들이었습니다. 지역적으로 동방 교회에서 열렸고 참석 주교 대다수가 동방 교회 주교들이어서 일각에서는 이 8차례 세계 공의회를 `동방 공의회`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또 한 가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8차례 세계 공의회 중 교황이 직접 참석한 공의회는 한 번도 없었고, 대부분은 사절들을 파견했다는 점입니다. 게다가 교황 사절들조차 참석하지 않은 경우도 381년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와 553년 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두 번이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방 교회인 로마 가톨릭교회는 이 여덟 차례의 공의회를 세계 공의회로 인정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로마 주교인 교황이 공의회 결정들을 승인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어떤 것은 훨씬 후대 교황이 승인한 경우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381년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를 들 수 있습니다. 이 공의회 결정사항 중 콘스탄티노폴리스가 로마 제국의 새로운 수도로서 서방 총대주교좌인 로마에 이어 동방 총대주교좌로서는 서열 첫위를 차지한다는 조항이 있었는데 당시 교황 다마소 1세는 이 조항이 마뜩잖아서 승인을 거부했습니다. 381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결정사항은 519년 호르미스다스 교황이 비로소 승인을 하지요.
 이 8차례의 공의회가 세계 공의회로 인정받은 또 다른 결정적 이유는 공의회 결정사항 자체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도표 참조). 그 중에서도 특별히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부터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 이르는 4차례의 세계 공의회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공의회들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들이 거의 대부분 확정됐기 때문입니다.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는 성자가 열등한 신이라는 성자종속설을 주장한 아리우스 이설을 단죄하고 성부와 성자가 똑같은 신적 본질을 지닌다고 선언했습니다. 381년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는 성령의 신성을 확인함으로써 삼위일체 교리를 정립했고, 431년 에페소 공의회는 마리아를 하느님의 모친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가 온전한 하느님이자 온전한 인간임을 분명히 합니다. 그리고 451년 칼케돈 공의회는 위격과 본성 개념을 도입, 예수 그리스도의 단일한 한 위격 안에서 신성과 인성이 고유한 속성을 간직한다는 신앙 정식을 확정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관한 논란에 종지부를 찍습니다.
 이런 신앙 정식을 바탕으로 교회는 553년 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는 네스토리우스주의에 속하는 삼장서를 단죄하고, 신성과 인성이라는 두 본성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인격 안에 위격적 일치를 이룬다는 칼케돈 공의회 결정을 재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또 680~681년에 개최된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신적 의지만 있다고 하는 단일설을 배격할 수 있었습니다.
 한편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로마를 중심으로 하는 서방 교회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중심으로 하는 동방 교회가 조금씩 틈이 벌어져 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작용합니다. 우선 정치적으로 로마제국의 중심이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겨가면서 콘스탄티노폴리스 영향력이 커졌습니다. 이는 이미 381년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이전까지 로마에 이어 두 번째 지위를 인정받았던 알렉산드리아 대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격상시켰다는 점에서 확인되고 있습니다.
 게다가 동방 교회 중심인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동로마(비잔틴)제국 수도로서 안정된 위상을 계속 유지하지만, 로마는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이후에는 동로마제국 영향에 들었다가 나중에는 서유럽을 통일한 프랑크왕국 보호를 받습니다. 이 또한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틈을 벌어지게 한 또 다른 정치적 요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화와 관습의 차이에서 비롯하는 교리와 교회 규율에 대한 상이한 시각도 두 교회의 틈을 더욱 벌어지게 하는 요소가 됐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성령께서는 성부에게서 발하시고`라는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신경에 서방 교회가 `그리고 성자에게서(filioque)`를 첨가해`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하시고`라고 신경 내용을 바꾼 것을 들 수 있습니다.
 867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포티우스가 교회회의를 열어 로마와 서방 교회를 공박하고 교황을 단죄한 이른바 포티우스 이교(離敎) 사건은 이런 틈이 표출된 대표적 사건이었습니다.
 포티우스 이교는 869~870년의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단죄되지만 이런 틈새로 인한 골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깊어지고 마침내는 1054년 교회가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로 완전히 결별하는 동서 대이교(大離敎)의 비극으로 이어집니다.
  이창훈 기자 changhl@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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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1-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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