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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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속 세계 공의회] <24> 제3차 라테라노 공의회(1179년)

대립 교황으로 분열된 교회의 일치 도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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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3차 라테라노 공의회를 소집한 알렉산데르 3세 교황(아래 원안)과 공의회가 열린 라테라노 대성전의 압시드(중앙 제단 뒤에 반 원형으로 들어간 부분)의 모자이크 화. 이 모자이크는 13세기에 제작됐다.
 

 이른바 `카노사 굴욕`(1077) 사건과 보름스 협약(1122)은 교황권과 황제권의 세력 대결에서 교황권이 승리한 대표적 사건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실추된 황제 권위를 회복해 제국이 교회를 지배해야 한다며 야심을 키운 군주가 있었습니다. 수염이 붉어 이탈리아어로 `바르바로사`라는 별명을 지닌 독일 황제 프리드리히 1세(재위 1152~1190)였습니다.
 교황 하드리아노 4세(재위 1154~1159)는 독일 황제의 이런 야욕에 맞서 선대 교황 그레고리오 7세의 개혁 정책, 곧 교회가 세속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울 뿐 아니라 영적 도덕적 권위에 있어서는 오히려 교황이 황제보다 위에 있다는 입장을 고수했습니다. 하드리아노 4세 교황에게는 신임이 두터운 추기경이 있었는데, 교황 상서원장 롤란도 반디넬리 추기경이었습니다.
 담대한 반디넬리 추기경 역시 교황과 뜻이 같았습니다. 그는 1157년 브장송 회의에서 프리드리히 1세 황제를 비롯한 독일 제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황제의 품위는 교황이 주는 은전"이라는 발언으로 황제의 반감을 샀습니다. 프리드리히 1세 황제는 모욕(?)을 참으면서 심복들을 로마에 사절로 보내 후일을 도모합니다.
 1159년 하드리아노 4세가 선종하자 반디넬리 추기경이 교황에 선출됐습니다. 그가 알렉산데르 3세(재위 1159~1181) 교황입니다. 여기에 반발한 일부 황제파 추기경들이 자기편 가운데 한 사람을 교황으로 선출했습니다. 대립 교황 빅토리오 4세(재위 1159~1164)였습니다.
 두 교황이 대립하자 프리드리히 1세 황제는 중재에 나섭니다. 자신의 영향력을 키우기 위한 의도적 시도였습니다. 황제는 파비아에서 교회회의를 소집하고 두 교황을 불렀습니다. 속내는 알렉산데르 3세를 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알렉산데르 3세 교황은 이를 거부하고 프리드리히 1세 황제와 빅토리오 4세 대립교황을 파문했습니다.
 대립이 격화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1164년 빅토리오 4세가 사망하자 프리드리히 1세 황제는 파스칼 3세(재위 1164~1168)를 다시 대립 교황에 앉힙니다. 또 파스칼 3세가 사망하자 갈리스토 3세(1168~1178)를 후임 대립교황으로 선출하지요.
 알렉산데르 3세 교황은 이 기간에 프랑스로 3년이나 피난 생활을 해야 하는 등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었지만 프리드리히 1세와 용감하게 투쟁하면서 교황권 강화와 교회 개혁에 힘을 쏟았습니다. 영국에서 헨리 2세 국왕과 켄터베리 대주교 성 토마스 베케트(1118~1170) 사이에 논쟁이 일어났을 때 베케트 대주교를 지지해 교권을 수호한 것도 이 시기였습니다.
 대립 교황을 앞세운 프리드리히 1세와 알렉산데르 3세 교황 간의 대결은 1177년에야 끝이 납니다. 알렉산데르 3세 교황을 지지하는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아 지역 도시 국가들이 동맹을 결성해 1176년 5월 롬바르디아 도시 레냐노에서 프리드리히 1세와 전투를 벌여 승리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듬해 7월 베네치아 강화 조약에서 프리드리히 1세는 교황 알렉산데르 3세에게 무조건 항복하면서 자신이 배후에 있었던 대립 교황과의 관계를 단절합니다. 그러자 대립 교황 갈리스토 3세 역시 이듬해인 1178년 8월에 알렉산데르 3세에게 항복하고 말지요.
 대립 교황으로 인해 분열된 교회의 일치를 도모하고 교회 개혁과 쇄신을 계속하기 위해 알렉산데르 3세는 로마 라테라노 대성전에서 공의회를 소집합니다. 이것이 11번째 세계 공의회인 제3차 라테라노 공의회입니다.
 
 

 공의회는 1179년 3월 5일에 개막합니다. 참석 주교는 300명 가량이었다고 합니다. 절반 가까이가 이탈리아 주교들이었지만 스페인과 프랑스 주교들은 물론 멀리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덴마크와 헝가리, 성지 팔레스티나에서도 참석했습니다. 동방 교회인 그리스 교회에서도 옵저버가 참관했고 대수도원장과 수도원장들도 대거 참석했습니다.
 회의는 모두 3차에 걸쳐 열렸다고 합니다. 대립 교황으로 인한 교회 분열을 치유하고 성직자의 기강을 바로 세우며 또 당시 남부 프랑스 일대에서 득세하던 이단을 단죄하는 것이 주 내용이었습니다. 공의회는 이와 관련해서 모두 27개 조항의 규정을 발표했습니다.
 가장 눈여겨볼 것은 교황선출에 관한 규정입니다. 규정은 추기경단에서 3분의 2 이상 지지를 받아야만 교황이 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를 위반한 자는 물론이고 그 지지자들까지 파문하고 성직을 박탈한다고 규정했습니다(1조). 대립 교황들이 한 모든 서품들과 그렇게 해서 수품된 이들이 베푼 서품들은 모두 취소되며, 자유 의사로 대립 교황을 지지한 성직자들 모두 파직됩니다(2조).
 성직자 기강 확립 및 생활과 관련된 조항들은 이러했습니다. 주교가 되려면 적자 출신이어야 하며 30살 이상이어야 하고, 신부가 되려면 25살 이상이어야 한다(3조). 주교들은 관할 지역을 방문할 때 방문지에 지나친 부담을 지우지 말아야 한다(4조). 주교들은 공석이 생기면 6개월 이내에 그 자리를 채워야 하지만 공석이 아닌데도 공석이 될 것으로 미리 예상하고 해당 성직자를 임명해서는 안 된다(8조). 부모가 교육비를 지불할 수 없는 가난한 학생과 성직자들의 양성을 위해 주교좌성당에 이들을 무료로 가르치는 교사를 둬야 한다(18조).
 유다인들과 사라센에 관한 조항들도 주목할 만합니다. 유다인이나 사라센은 어떤 이유로든 그리스도인을 노예로 삼아서는 안 되며, 모든 소송에서 유다인보다 그리스도인의 말을 더 들어야 하며 그 반대로 하는 이는 파문된다(26조). 사라센에게 선박이나 무기 자재를 제공하는 자를 파문하고 그 재산을 몰수한다(24조). 중세 유럽이 유다인이나 사라센에게 얼마나 적대적이었는지를 알게 해주는 규정들입니다.
 당시에는 십자군 전쟁과 함께 많은 나환우들이 생겨났다고



가톨릭평화신문  2011-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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