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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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속 세계 공의회] <25>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12)(상)

교황권 확립하고 교회 개혁 불 지피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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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가 열린 로마 성 요한 라테라노 대성전 중앙 제대.
 

▨배경

 "내가 고난을 겪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파스카 음식을 먹기를 간절히 바랐다"(루카 22,15).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를 소집한 교황 인노첸시오 3세(재위 1198~1216)가 공의회 개막 연설에서 인용한 복음 구절입니다.
 교회사에서 12번째 세계 공의회로 기록되는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1215)는 이처럼 인노첸시오 3세의 염원이 결실을 맺어 소집된 공의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노첸시오 3세가 공의회를 개최한 목적은 무엇일까요? 역시 개막연설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악습을 뿌리 뽑고 덕행을 심기 위해, 오류를 교정하고 풍토를 개혁하기 위해, 이단을 척결하고 신앙을 강화하기 위해, 불화를 가라앉히고 평화를 구축하기 위해, 억압을 제거하고 자유를 증진하기 위해, 군주들과 그리스도 백성들이 성지에 가서 도움을 주도록 설득하기 위해…" 공의회를 소집했다고 교황은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를 탐색하기 전에 공의회를 소집한 인노첸시오 3세 교황에 대해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중세기의 위대한 교황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히는 인노첸시오 3세는 이탈리아 중부 라치오 지방 출신입니다. 세니 백작의 아들이자 교황 클레멘스 3세(재위 1187~1191)의 조카로, 원래 이름은 로타리오 데 세니였습니다. 어린 시절 로마에서 교육을 받지만 나중에 파리에서 신학을, 볼로냐에서 법학을 공부한 수재였습니다.
 로타리오는 1190년에 부제 추기경에 임명됩니다. 그리고 교황 첼레스티노 3세(재위 1191~1198)가 선종한 1198년 1월 8일에 2차 투표에서 만장일치로 교황에 선출되고 2월 22일 인노첸시오 3세라는 이름으로 교황에 즉위합니다.
 37살(혹은 38살)의 젊은 교황은 재위 초기부터 공의회 개최에 뜻을 두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현실이 따라 주지 못했습니다. 세속 권력과의 관계에서 교황권은 불안정했고 많은 난제들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인노첸시오 3세는 이를 현명하게 처리해 나갔습니다. 물론 실패도 겪었습니다.
 당시 신성로마제국 곧 독일 황제는 교황권과 자주 대립했습니다. 인노첸시오 3세가 교황이 됐을 때는 마침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6세(재위 1190~1197)가 사망하고 후임 황제가 공석이었습니다. 이 기회를 절묘하게 이용한 교황은 황제를 선출하는 것은 제후들의 몫이지만 이를 검증하고 대관식을 수여하는 것은 교황의 배타적 권리임을 주지시킵니다. 마침내는 자신이 후견인으로 보호해온 프리드리히 2세를 황제로 앉힘으로써 교황권을 공고히 하지요.
 교황은 또 예루살렘 성지 회복을 위한 제4차 십자군(1202~1204)을 조직합니다. 하지만 십자군은 실패하고 말지요. 베네치아 상인들의 농간으로 십자군은 성지를 탈환하는 대신에 동방 교회 중심지인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해 약탈과 파괴를 자행합니다. 이로 인해 동ㆍ서 교회의 분리가 돌이킬 수 없는 상태로 치닫는 결과를 빚게 됩니다.
 교황은 프랑스 남부 도시 알비를 중심으로 득세하고 있던 알비파 이단을 척결하기 위해 또 다른 십자군을 조직토록 합니다. 카타리파 이단의 추종자들인 알비파는 세상을 물질 세계와 영적 세계의 대결로 보면서 극단적 이원론을 펼쳤습니다. 물질세계를 모두 악으로 규정했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인간성과 십자가 죽음, 육신의 부활을 부인했습니다. 결혼과 심지어 음식을 먹는 것도 죄악시했습니다. 오히려 굶어 죽는 것을 구원의 길로 여겼다고 하지요. 이 알비파 이단이 프랑스 교회 전체를 위험에 빠뜨리게 할 뿐 아니라 교황 사절까지 살해하는 등 폐해가 심각하자 교황이 십자군 조직 명령을 내린 것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교황은 혼란에 빠진 프랑스의 안정을 도모할 수 있었습니다.
 교황은 또 캔터베리 대주교 임명을 둘러싸고 영국 왕과 대립했지만 끝내 자신의 의사를 관철시켜 스티븐 랑톤을 캔터베리 대주교이자 추기경으로 임명하고 존 왕의 굴복을 이끌어냅니다. 그러나 영국 귀족들이 존 왕에게서 `대헌장`(Magna Carta)의 서명을 얻어내자 교황은 자신의 동의도 없이 강요된 서명이라며 대헌장 자체를 무효로 선언하기도 합니다. 대헌장은 전제군주적 왕권을 제한한 역사적으로 중요한 문서입니다.
 교황은 이 밖에도 아라곤(스페인 북부 왕국), 포르투갈, 헝가리, 폴란드와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에 대해서도 교황권을 적절히 행사하여 분쟁을 조정하고 평화를 도모합니다.
 이런 일련의 난제들을 수행하면서 교황권을 다지고 교회의 자유를 도모해온 교황은 마침내 재위 초기부터 뜻을 둔 교회 개혁을 위한 공의회를 개최하기로 결심합니다. 인노첸시오 3세는 1213년 4월 19일 칙서를 통해 세계 공의회를 라테라노 대성전에서 소집한다고 발표했습니다. 공의회 소집일은 1215년 11월이었습니다.
 
▨공의회 개최와 과정

 공의회는 1215년 11월 11일에 개막했습니다. 참석 주교는 대주교 70명 이상을 포함해 400명이 넘었습니다. 대수도원장과 수도원장도 800명에 이르렀고, 주교좌성당 참사회 대표들도 처음으로 참석했습니다. 신성로마제국(독일) 황제를 비롯해 비잔틴 황제, 프랑스와 영국, 아라곤과 포르투갈, 헝가리, 시칠리아 왕들도 모두 사절들을 보냈습니다. 참석자로 보면 가장 규모가 큰 그야말로 총공의회였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내용의 교황 개막 연설이 끝난 후에 예루살렘 총대주교가 성지의 비참한 상황을 설명했고, 프랑스 주교는 프랑스 남부의 알비파 이단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교황과 두 고위 성직자의 개막 발언은 공의회가 어디에 관심을 쏟을 것인지 가늠케 해주었습니다.
 회의는 개막일인 11일에 이어 20일과 30일 3차에 걸쳐 열렸습니다. 회기 중에 몇 가지 정치적 사항을 결정합니다. 교황은 프리드리히 2세를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거듭 임명하고, 캔터베리 대주교 스티븐 랑톤 추기경에 대해서는 직무정지를 내립니다. 존 왕에게 대헌장에 서명하도록 강요한 영국 귀족들을 견책하지 않았고, 또 대헌장을 파기하라는 교황의 지시를 거부했다는 이유에서입니다.
 공의회는 마지막 회기에서 모두 70개 조항에 이르는 법령을 낭독하고 승인합니다. 가톨릭 신앙에 관한 제1조와 요아킴 수도원장의 오류를 지적하는 제2조를 제외한 나머지 조항들은 모두 교회 생활과 규율에 관한 내용들입니다. 제도와 조직, 성직자 생활, 교회 재산 처리, 십일조, 교구와 수도회 관계, 평신도 생활 등 중세기 교회 생활과 관습과 관련된 전반적 사항을 망라하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를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이 공의회 법령을 통해서 당시 교회 생활상을 들여다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 호에서는 이 법령의 주요 내용들을 살펴봅니다.
이창훈 기자
changhl@pbc.co.kr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11-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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