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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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적 삶으로의 초대Ⅱ] (71) 하느님 뜻과의 조화 (35) 구체적 삶의 전환인 영성 생활

주님 뜻 찾고 귀 기울이는 것이 영성생활의 출발/ 영은 구체적으로 나와 공동체를 변화시키는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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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정신에 대해 집중적으로 탐구해 보자. 인간 신체와 정신, 마음이 모두 상호 형성의 관계다. 단단한 쇠사슬 고리로 연결돼 있다. 마음이 건강하면 육체와 정신도 건강하고, 육체가 건강해야 정신과 마음의 건강도 가능해진다. 이 세 가지 고리가 다시 이웃과 세계와 고리를 맺고 있다.

하느님이 그렇게 내 안에서 형성되도록 하고, 그 형성을 이웃, 더 나아가 내가 머무는 상황과 그리고 더 넓은 차원의 세계와 나누라고 나를 창조하셨다. 이것이 상호형성 그리고 상황형성이다. 육신과 정신, 마음과 정신, 나와 이웃과 상황, 세계와의 모든 관계가 공동으로 형성관계를 맺고 있다.

이 형성이 잘 이뤄질 때 우리는 하느님과 합치할 수 있고, 이웃에 대해 연민으로 대할 수 있고, 세상과 융화하고, 세계를 향해 역량을 발휘할 수 있다. 그렇게 공명, 즉 하느님 뜻과의 완벽한 조화로 나아갈 수 있다. 이렇게 형성의 신비를 구현하지 않으면 공명으로 나아갈 수 없다.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이러한 공명의 삶을 꿈꾼다. 그런데 왜 많은 신앙인들이 하느님과의 합치와 이웃에 대한 연민, 세상과의 융화, 더 나아가 영적 역량을 발휘하는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일까. 왜 하느님과 조화를 이루는 완벽한 삶을 성취하지 못하는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우선 나 개인을 중심으로 본다면 육신과 정신과 마음이 조화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웃과의 관계에서 본다면 모든 관계가 경쟁과 비교 관계로 대하기 때문이다. 상황에 대해서도 모두 나만 잘 되려고 소유와 이권의 욕심 상황을 만들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불공명, 하느님 뜻에서 조화롭지 않은 삶이다.

이런 삶을 사는 원인은 가장 먼저, 정신에서 찾을 수 있다. 육신과 정신과 마음이 조화를 이뤄야 하는데 정신이 과도하게 커지기 때문이다. 현대인 중 머리(지성)만 큰 가분수가 많지 않은가? 많은 이들이 정신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일이 생기면 하느님 뜻 안에서 영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생각, 내 판단에 의존하는 이들이 많다. 이렇게 정신적 차원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면 더 깊은 것을 못 깨닫게 된다. 틀에 박힌 삶만 살게 된다.

우리는 수많은 계획을 수립하고 살아간다. 스마트폰 일정표를 보라. 혹은 집에 있는 달력을 보라. 얼마나 많은 계획이 거기에 적혀 있는가. 물론 일정표 없이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늘 사람을 만날 약속을 하고, 해야 할 일들을 계획하고 그 일정에 따라 살아간다. 문제는 그 일정표가 정신의 역할적 차원에만 머무른다는 데 있다.

하느님 안에서 영감을 받으면, 하느님 안에서 초월이 되면 이 일정표가 바뀐다. 육신적 시간표도, 정신적 시간표도 영적인 시간표로 바뀐다. 정신적 에너지를 줄이고 영적 에너지를 사용하면 모든 것이 바뀐다. 육신에 치우치는 삶을 살아도 영적으로 바뀌고, 정신적 판단도 영적 판단이 된다.

우리는 혼자 살 수 없다. 혼자서 사막에서 하느님을 신앙한다는 것을 불가능하다. 우리는 봉쇄수녀원에서 살지 않는다. 그래서 시계와 달력, 일정표는 참으로 중요하다. 이것 없이 사회생활을 한다는 것을 불가능하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육체와 정신이라는 소중한 선물을 주신 것도 육신과 정신을 잘 활용해서 사회생활을 잘할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정신으로 계획하는 것이 완성된 것이 아니라, 여기에 영적인 에너지가 첨가돼야 한다는 점이다. 하느님께 귀를 기울이고 봉헌하고, 오직 하느님의 뜻을 찾아야 한다. 이것이 영성 생활의 출발이다.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께서 말씀하신 ‘영혼의 성’에는 영성의 단계별로 방이 있다. 1~2궁방까지가 바로 정신으로 다가가는 것이다. 하지만 3궁방부터는 마음의 단계, 정감의 단계다. 이 단계는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때를 기다리고 찾는 것이다.

정신으로, 머리로 보내는 역할적 시간은 영의 시간이 아니다. 여기서 역할적 시간이라고 말한 것은 정신으로 하는 것은 주어지는 것을 수행하는 역할 범주를 넘어서지 못하기 때문이다. 영으로 하면 초월적 시간이 된다. 역할적 시간, 정신적 시간을 영의 시간과 혼동하면 안 된다.

영과 정신은 어떤 차이인가. 이것을 분별해야 한다. 영은 단순히 신비스러운 어떤 것이 아니다. 한 개인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고, 완전한 전환을 이뤄내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것이 영이다.

하느님은 순수 영이시다. 가장 순수한 영이시기에 역사 안에서 구체적으로 활동하는 것이다. 인간 역사에는 하느님 영의 힘이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인간의 영도 마찬가지다. 영을 구현하면 그 힘은 나의 삶에 구체적으로 영향을 주게 된다.

영은 구체적으로 내 눈과 입, 정신, 환경, 공동체를 변화시키는 힘이다. 영은 뜬구름이 아니다. 저 멀리 무지개 나라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영의 힘, 공동체의 영의 힘, 나 자신의 영의 힘이 절대적으로 역사 내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영성 생활한다는 것이 구체적 삶의 전환을 의미한다고 이야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정영식 신부 (수원교구 군자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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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12-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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