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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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적 삶으로의 초대Ⅱ] (72) 하느님 뜻과의 조화 (36) 침묵 중 기도하며 삶 바라보기

정신 가득한 곳에 마음 들어설 자리 없어/ 눈·말·표현 모두 구체적으로 영적이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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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빛이 변해야 한다. 입에서 나오는 말이 변해야 한다. 밥 먹는 자세가 변해야 하고, 운동하는 모습이 변해야 한다.

이것이 영성 생활이다. 영성 생활은 대단한 그 어떤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영과 함께하면 나의 영이 변화되고, 그 변화는 자연스레 삶으로 드러난다. 거꾸로 말하면 삶으로 드러나지 않는 영성은 영성이 아니다.

테니스를 하면서 관상을 할 수 있고, 수영 강습을 받으면서도 하느님을 진하게 체험할 수 있다. 등산하면서 “오! 주여!”하고 감탄할 수 있고, 자전거를 타면서도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다. 영성 생활은 성당이나 성체조배실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다. 영성생활은 등산하면서, 밥 한 끼 먹으면서 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정신만 과도하게 쓰면 영의 초월적 시간을 보낼 수 없다. 정신은 슈퍼마켓에서 물건을 산 뒤 계산할 때 사용하는 것이다. 어떤 물건을 구입하는 것이 나에게 이로울지, 또 어떻게 해야 수영 기록을 단축할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탁구 게임에서 이길 수 있을지를 생각하는 것이 정신이다. 등산하면서 어떻게 하면 정상에 최단 코스로 오를 수 있을지 지도를 면밀히 살피는 것이 정신의 역할이다.

하지만 영을 사용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양복점 주인이 양복을 만들 때 손님의 몸 치수를 정확히 계산해 내는 것은 정신이다. 하지만 영을 사용하면 관상 양복점이 될 수 있다. 옷 하나 만들면서도 하느님을 만나는 관상이 가능하다. 마찬가지로 관상 이발소, 관상 음식점도 가능하다.

이처럼 영적으로 사는 것과 정신적으로 사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물론 여기서 정신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다. 정신 또한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선형성 해 주신 선물이다. 우리는 정신을 최대한 활용해 지식적 차원에서 하느님을 파악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하지만 정신적인 차원에만 머무른다면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미리 섭리해 놓으신 형성의 신비를 성취해 낼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정신에만 매여 사는 삶이 아닌, 영적인 삶을 살 수 있을까.

기억을 되살려 보라.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영적인 삶으로 전환한 계기들이 있었을 것이다. 세례받는 그 순간은 영이 작동한 순간이다. 하지만 인간은 나약하기에 곧 정신적 삶으로 떨어진다. 냉담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냉담교우는 정신으로 신앙을 바라보기에 영적 양분이 고갈되어 있다.

삶을 팍팍하게만 바라보면 빈틈이 없게 된다. 삶에 여유가 없게 된다. 삶을 관조할 필요가 있다. 조용히 촛불을 켜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요즘 우리는 잠시도 가만히 있는 시간을 못 견뎌 한다. 잠시라도 시간이 나면, 스마트폰을 들여다 보고 있고, 텔레비전을 시청한다. 과도하게 취미생활에 몰두하기도 한다. 심심한 것을 못 견뎌 한다.

이래서는 내적 충만함을 체험하기 어렵다. 그러면서 기도가 어렵다고 한다. 성당에서 신자들에게 기도를 하라고 하면 다들 한 목소리로 기도가 어렵다고 한다. 정신적 차원으로만 살아왔기 때문이다. 내 계획과 생각을 옆에 툭 던져 놓는 것을 해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상 모든 걱정과 해야 할 수많은 일을 작은 머리에 모두 붙잡아 두려고 안달이다.

이렇게 우리는 무엇이 영적인 것인지 무엇이 정신적인 것인지 분별을 하지 않고 대충 살아간다. 정신적으로 살아가면서 영적으로 살아간다고 착각하고, 정신적 차원에만 머물고 있으면서 하느님 나라를 위해 땀 흘리고 봉사한다고 생각한다. 성당에서 ‘정신없이’ 봉사하면서 정작 깊은 영적 갈망을 일으키지 않는 이들이 많다. 겉으로는 끊임없이 기도하는 신앙인으로 보이지만 정작 정신적 차원의 기도만 하는 이들도 많다.

하느님은 구체적인 것을 좋아하시는 분이다. 내 눈이, 내 말이, 내 표현이 구체적으로 영적이어야 한다. 하느님은 우리 모두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직접 역사하시는 분이다. 그런데 우리들의 모습을 보면 마치 하느님이 주무시고 계시는 듯이 보인다. 어떤 이들에게 있어서 하느님은 10년 아니 30년 동안이나 휴가 중이시다. 하느님께서 빨리 휴가를 끝내고 내 마음속으로 오셔야 한다. 아니, 이미 와 계시는 하느님을 발견해야 한다.

생각하는 사고의 힘을 뛰어넘는 깊은 생각이 영이요 마음이다. 따라서 정신을 약간 내려놓아야 한다. 계획들로 가득 찬 정신을 비워야 한다. 달력에 해야 할 수많은 계획과 약속들이 적혀 있는가. 그 달력을 잠시 보이지 않는 곳에 놓아두는 것은 어떨까.

정신으로 가득한 곳에 마음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정신이 활개를 치면 영이 굳어지는 영적 심장마비가 온다. 몸만 심장마비로 망가지는 것이 아니다. 영적 심장이 작동하지 않으면 우리의 삶은 맑은 피를 공급받을 수 없게 된다.


정영식 신부 (수원교구 군자본당 주임)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12-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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